—많은 파룬궁수련자들도 간과한 사실
글/ 정옌(鄭岩)
[명혜망] 지금은 6월 중하순으로 명혜망 설립 26주년이기도 하다(역주: 명혜망은 1999년 6월 21일에 창립됐다). 왜 이 기념일이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궁을 철저히 적으로 간주하여, 개별적인 악인들의 중상모략과 사리사욕 추구에서, 전방위적이고 조직적인 대규모 박해로 전환한 것이 1999년 6월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박해는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7·20(중국의 7월 19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파룬궁수련자들의 반(反)박해도 6월 명혜망 설립일부터 개별적인 반박해에서 전체 반박해로 나아갔다.
이 점은 아마 1999년이나 그보다 늦게 수련을 시작한 많은 파룬궁수련자들도 몰랐을 것이다. 중국에서 태어난 80년대생, 90년대생, 2000년대생, Z세대, A세대는 이에 대한 개념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어떤 집단들이 반드시 죽어야 하는가?
수많은 사료를 통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중공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후예로서, 폭력·증오·투쟁·반신(反神)·반사회·반인류 사상을 기초와 지도로 삼아 창건 초기부터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1949년 정권을 찬탈한 후에는 중국인 집단을 차례로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치운동을 지속적으로 발동했다. 이들은 민족자본가든 향신(鄕紳, 지방) 지주든 지식인이든 청년학생이든 모두 중국의 사회 중견층이자 희망이었다. 중국인과 염황(炎黃, 중국인의 시조인 염제와 황제) 조상의 혈맥 연결을 차단하고, 중국인의 생존 이념과 생존 방식을 철저히 바꾸기 위해, 사상 속에 중국 전통문화와 사고능력을 갖춘 이런 중국인들은 반드시 죽어야 했다.
어떻게 죽이는가? 그들이 사상을 포기하고 재산을 포기하며 인생 이념을 포기하도록 강요한다. 따르지 않으면 ‘육체적으로 소멸’시킨다.
‘소멸’은 중공이 특별히 즐겨 쓰는 단어로, 증오와 악독함, 폭력으로 가득하다. 26년 전 6월, 중공이 하나의 정당으로서 전국의 힘으로 파룬궁을 박해하기로 결정했을 때, 파룬궁 박해기구 중앙 ‘610사무실’을 설립했다. 대규모 박해의 시작점을 표시하는 이 610이 내놓은 파룬궁 박해 정책 역시 ‘육체적 소멸’을 말했다. “명예상 더럽히고, 경제상 무너뜨리며, 육체상 소멸시킨다.” 더럽히기, 무너뜨리기, 소멸시키기—이 세 단어 모두 흉악함과 악독함, 피비린내로 가득하다. 이는 중공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자, 610이 창의성이 전혀 없이 중공이 중난하이(中南海)에서 50년간 연습한 투쟁 전략을, 진선인(眞·善·忍)을 지도로 하여 중국 사회에 안정과 건강, 도덕적 방향을 가져다준 불가 수련법문인 파룬궁에 잔혹하게 적용했음을 보여준다.
소수의 악인과 전당 출격
중공 역사상 매번의 숙청운동에는 개별적인 악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사적 이익을 위해 고심하며 꾀를 냈다. 개별적인 숙청이 중공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면, 중공은 정당의 명의로 이를 접수했다. 이럴 때마다 전문조직을 성립하고, 미디어로 증오를 선전하며, 군중으로 군중을 투쟁시키는 세 가지 피비린내 나는 살인 무기가 등장했다. 26년 전 발동된 파룬궁 박해 운동도 같은 방식이었다. 6월에 설립된 610사무실이 그 전문조직이고, 우한(武漢) TV가 증오를 선전하는 미디어였으며, 군중을 선동해 군중을 투쟁시키는 것은 중공의 전매특허였다. 결국 소식이 차단되고 정보가 편파적이며, 당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려 하고, 독립적 사고 습관이 없어 남의 말을 쉽게 따라하는 일반 민중이 줄곧 중국 인구의 절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우한’이라는 이름은 2019년 12월부터 2020년 3월 사이 폭발한 코로나19 때문에 이미 전 세계가 아는 이름이 됐다. 우한바이러스연구소가 우한에 있고, 우한 수산시장, 우한 봉쇄가 있었다. 우한은 지난 6년간 중국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전 세계에 파급되어 아직 떠나지 않은 코로나 대역병에서 대체 불가능한 부정적 역할을 맡았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최소 수백만의 중국인을 살해한 이 파룬궁 박해 운동에서도 우한은 같은 역할을 했다. 차이점은 사고를 일으킨 기관이 우한바이러스연구소가 아니라 우한 TV였다는 것이다.
명혜 자료에 따르면, 1999년 6월, 우한 TV 국장과 기자 쑹(宋)모 씨가 어느 공안국의 위탁을 받아 파룬궁을 반대하고 창시자 리훙쯔(李洪志) 대사를 악독하게 인신공격하는 비디오를 제작해 중앙TV에 송부했고, 중앙TV ‘커지즈광(科技之光)’ 프로그램에서 방송할 예정이었다.
1999년 7월 파룬궁 탄압이 시작된 후 많은 중국인들이 자주 한 말이 있다. 파룬궁을 건드리는 것은 ‘개별적인 악인’, ‘자질이 떨어지는 개별적인 경찰’이라는 것이었다. 즉 중공은 좋고 당은 위대하고 영명하며, 정부는 파룬궁을 박해할 뜻이 없다는 의미였다. 지금 우리가 역사를 돌아보면 이런 인식이 얼마나 순진하고 일방적인 희망사항이었는지 알 수 있다. 생각해보자, 중국인들은 혼란스럽고 불안한 가난한 날들, 고생스러운 날들을 충분히 겪었고, 80년대에 겨우 경제적 개혁개방을 맞이했는데 누가 다시 운동을 벌이고 싶어 하겠는가? 하지만 당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아니었다. 개별적인 악인, 자질이 떨어지는 개별적인 경찰은 확실히 존재했지만, 당이 사람을 숙청하고 중국인이 독립적으로 사고하려는 ‘기도’의 싹을 끊임없이 자르려 하며, 당의 낫 아래에는 당의 지휘를 받지 않는 부추가 있을 수 없었다.
미디어 전쟁과 집단 말살
우한 TV로 돌아가자. 그들이 비디오를 중앙TV에 넘긴 후, 중앙TV ‘커지즈광’ 프로그램 제작진 일행이 6월 22일부터 25일 사이 창춘(長春, 리훙쯔 대사의 고향)에서 파룬궁 반대 자료를 전문적으로 수집하고 극도로 짜맞추는 일련의 활동을 벌였다. 그들에게 자료를 제공한 주요 인물은 쑹빙천(宋秉辰), 자오제민(趙潔民) 등이었다. 그들의 소행은 지린성 파룬궁수련자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쑹, 자오 등은 파룬궁을 배운 적이 있지만 진심으로 배우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공 진료소를 개설해 파룬궁을 이용해 병을 치료하고 돈을 벌려고 했다. 이는 파룬궁 원칙에 심각하게 위배되는 것이어서 리훙쯔 대사의 엄중한 비판을 받았고, 취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후 그들은 원한을 품고 줄곧 파룬궁을 적대시했다. 중앙TV가 오자 서로 뜻이 맞아 마침 날조와 유언비어, 중상모략 수단으로 사적인 원한을 발산했다. 중국 파룬궁수련자들이 당시 명혜망에 보낸 증언에 따르면, 우한 TV 기자 쑹 씨는 영상 제작 과정에서 더욱 문맥을 무시한 편집과 사실 왜곡 수법을 사용하고, 공격적인 나레이션을 더해 완전히 흑백을 뒤집는 선전 효과를 만들어냈다.
이로써 파룬궁을 겨냥한 미디어 전쟁이 중국에서 시작될 조건을 갖췄다. 따라서 오늘날 중공이 미국에서 발동하는 미디어 전쟁도 중국에서 26년간 연마한 반(反)파룬궁 미디어 전쟁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독특한 점이 있다면, 미국의 전통 미디어와 개인 미디어 플랫폼을 이용해 ‘언론의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명목으로 중공에게 ‘투쟁 승리’의 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런 환경의 목표는 중공이 ‘승리’(정신적 또는 육체적 말살)하려는 모든 집단과 개인이다.
새로운 것이 전혀 없는 투쟁 수법
물론 엄격한 의미에서 이런 ‘미국(인)을 이용해 미국(인)을 투쟁’시키는 수법은 독특하지 않다. 중국에서 ‘군중을 이용해 군중을 투쟁’시키는 것의 연장이다. 중공이 당시 국민당의 민주사상을 이용해 ‘국공합작’의 명의를 빌려, 국민당이 항일에 바쁜 틈을 타 국민당 내부에 침투해 내부에서 침투·분열·사변을 일으키며 최종적으로 정권을 탈취한 것도 같은 수법이었다. 이것들은 모두 중공 투쟁의 성공 경험이다.
본문에서 우한을 단독으로 언급하는 것은 모든 우한 사람들이 어떻다는 것이 아니다. 중공의 공식 수치에 따르면, 2025년 우한은 여전히 1300만 인구의 대도시이며, 그중 음흉한 속셈을 가진 말썽꾼들은 결국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중공의 미디어 선전을 믿고 중공을 따라 조용히 큰돈을 벌며, 박해에서 부채질해 개인의 승진과 부를 도모하는 사람들은 통계하기 어렵다. 나중에 우한에서 먼저 대면적으로 역병이 폭발한 것은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공업(共業)’이 성숙한 후 피하기 어려운 업보가 아닐까? 그렇다면 중공국 전국의 업보가 전면적으로 실현되기 전에, 우리 모두는 자신과 가족,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옳은 일’을 한 것일까?
증오는 마르크스 유전자에서 나온다
증오를 다시 말해보자. 무신론을 자처하는 중공 당도(黨徒)들은 ‘죽으면 마르크스를 만나러 간다’를 입에 달고 산다. 사실 진정한 마르크스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마교도였다. 칼 마르크스는 1818년 독일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6세 때 가정이 기독교로 개종해 마르크스는 기독교도가 되어 하나님을 믿었고, 고등학교 졸업까지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대학 진학 후 그는 비밀리에 조안나 사우스콧(Joana Southcott)이 주재하는 사탄교회에 가입해 악마교의 일원이 됐고, 이후 성격이 크게 변해 마음속에 증오가 가득했다. 죽은 후 마르크스는 런던 지역의 사탄교 숭배 중심지인 하이게이트 묘지에 매장됐다.
중공이 조상으로 받드는 마르크스는 독일인, 중국인, 유대인을 증오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저작에서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을 위해 분투한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산계급을 ‘바보, 악한, 엉덩이’라고 불렀고, 흑인을 ‘백치’라고 불렀다.
마르크스는 그의 시 ‘연주자’에서 “지옥의 기운이 올라와 내 머리를 가득 채우니, 내가 미치고 내 마음이 완전히 변했다. 이 칼을 보았는가? 어둠의 왕이 그것을 나에게 팔았다. 나를 위해 시간을 채찍질하고 나에게 표식을 주었으니, 나의 죽음의 춤은 더욱 대담하게 춰지는구나”라고 썼다.[1] 마르크스는 또 ‘절망자의 저주’에서 “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증오뿐”이라고 했고, “나는 위에서 내 왕좌를 세우리니, 차가움과 공포가 그 꼭대기이고, 미신의 전율이 그 토대이며, 그 주인은 바로 가장 어두운 극도의 고통이다”라고 썼다. 시는 그의 깊은 갈망을 드러냈다. 즉 공포의 왕이 되어 온 세상을 파멸시키는 것이었다.
맺음말
친구들이 이 글을 통해 다음을 보기 바란다. 1. 중공의 파룬궁 박해 시작 시기는 1999년 6월이다. 2. 우한 TV는 이번 박해를 위해 준비한 미디어 전쟁 단계에서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중공의 파룬궁 박해 전략은 ‘명예상 더럽히고, 경제상 무너뜨리며, 육체상 소멸’시키는 것이며, 이런 전략은 중공이 중국 인민에게 50년간 연마한 후에야 비로소 파룬궁 신앙자들을 말살하는 데 사용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공의 증오와 반인류 본성은 그 시조인 마교도 칼 마르크스로부터 전승받은 것이다. 지옥에 가는 것은 전혀 재미있지 않으며, 그곳의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은 절대 농담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모두 밝고 선량한 아름다운 미래를 향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용감하게 진상을 마주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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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절대 ‘마르크스를 만나러 가지’ 마라>, 명혜망 2017년 2월 14일: 사탄교의 승급 제례에서 마법을 걸어 성공을 보장하는 칼이 승급자에게 팔리는데, 승급자가 치르는 대가는 자신의 혈관 속 피로 악마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죽은 후 그의 영혼은 사탄에게 속하게 된다.
원문발표: 2025년 6월 23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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