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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팬데믹 상식을 뒤집다(상)

전염병 창궐, 하늘이 명나라를 멸하다

글/ 구진(古金)

[밍후이왕] 밍후이왕에 발표된 ‘대명겁(大明劫)에서 대역병의 재앙’이라는 글은 학술계를 당혹스럽게 하는 신기한 역사적 현상을 다루었다. 명나라가 대역병으로 망했지만, 청나라 군대는 피해를 보지 않은 것이다. 청나라 군대는 본토로 진입한 후, 단숨에 남쪽으로 쇄도해 중국을 통일했는데, 전염병도 신기하게 사라졌다. 마치 전염병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온 듯했다.

왜 이럴 수 있을까? 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오유성[吳有性, 자는 우가(又可)]은 전염병 치료에 소질이 있었고, 도가의 진언(眞言)과 달원음(達原飲) 약재를 이용해 가는 곳마다 전염병을 치료했다. 그러나 떠돌이 의사가 갈 수 있는 범위는 아주 제한적이었고, 전염병의 거침없는 확산과 빠른 전파를 전혀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전국적인 전염병이 명나라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 왜 이럴 수 있을까?

아래에서 당시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어본다.

1. 하늘이 상식을 깨뜨리며 현묘한 이치를 드러내다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에 침입하자 명나라 숭정 황제가 경산(景山)에서 목을 맸다는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다.

图1:北京景山公园纪念明朝崇祯帝自缢殉国处,古歪脖树已死,后来移植了新株。
베이징 경산공원의 명나라 숭정제 순국 장소. 오래된 굽은 나무는 이미 죽었고, 나중에 새로운 나무를 옮겨 심었다.

(1) 정세에 순행해 천하를 얻고, 정세에 역행해 강산을 잃다

숭정 17년 원단[1](1644년 2월 8일), 이자성이 서경(西京, 현재의 시안)에 순나라 정권을 설립했다. 청나라 정권을 장악한 도르곤(多爾袞)은 순치제(7살)의 명의로 이자성에게 편지를 보내 중원을 함께 차지하자고 제안했다. 명나라의 도시 방어가 견고했고, 특히 베이징을 감싼 두꺼운 벽돌 성벽은 사실상 공격이 어려웠으며, 선황인 숭덕제와 도르곤이 견고한 성에 주둔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자성은 청의 중원 분할 제안을 무시했다.

3월 10일, 이자성은 친히 기병과 보병 50만을 지휘해 동쪽 정벌에 나섰고, 우문구(禹門口)에서 황하를 건너 산서(山西)로 진입했다. 이후 순나라 군대는 연전연승하며 수많은 지방을 추풍낙엽처럼 함락시켰다. 3월 하순에 산서 전체를 점령한 후, 하북(河北)의 정정(正定)과 보정(保定)을 손에 넣었다.[2] 4월 23일, 군대는 베이징 외성(서직문 앞)에 도달했다.[1] 이 날 명나라 군대의 3대 수비군이 궤멸하여 투항했고, 밤에는 태감(太監)이 외성의 창의문(彰義門)을 열고 투항했다.[4] 25일, 내성이 함락됐고, 숭정제는 도망하지 못해 경산에서 자살했다.

동쪽 정벌로 천하를 안정시키는 일이 순조롭다는 것을 거의 모든 사람, 특히 청나라의 도르곤은 짐작하고 있었다. 이후 사람들이 잘 알듯이 순나라 군대는 북경에서 관리들을 고문해 군비를 강탈했다.[5] 의병 장교와 사병들은 교만하게 약탈하며 음행을 일삼았고,[6, 7] 귀순을 준비하던 산해관(山海關) 수비 장수 오삼계(吳三桂)의 반발을 초래했다. 이자성이 산해관을 공격하자 오삼계는 청나라에 진입을 요청했고, 순나라 군대는 청나라 군대에 섬멸되어 패주했다. 이자성이 명나라를 멸망시킨 지 겨우 39일 만에 다시 강산의 주인이 바뀌었다.

(2) 정세에 순행하니 전염병 속에 기적이 나타나다

이자성의 의병은 초기에 전쟁이 전혀 뜻대로 되지 않아 세 차례나 전군이 전멸했고, 그때마다 힘들게 재기했다. 숭정 14년(1641년)이 되어서야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1642년에 하남(河南)을 지배했고, 1643년 동관(潼關)에서는 명나라의 주력인 손전정(孫傳庭)의 대군을 섬멸했고, 1644년 동쪽 정벌로 진기(晉冀, 산시-허베이)를 토벌하고 가볍게 북경을 손에 넣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쉬워졌을까? 다른 역사 자료와 대조하면 바로 알 수 있듯이 전염병이 있었다.

1641년, 명나라에 전염병이 다시 일어나 엄청난 1차 유행이 시작됐고, 확산한 지역은 현재의 경진기(京津冀, 베이징-톈진-허베이)[8], 강절호(江浙滬, 장쑤-저장-상하이)[9], 노예환(魯豫皖, 산둥-허난-안후이)[10] 등과 같았다. 일부 지방에서는 ‘열 집에 아홉 집이 죽었고’, ‘한 골목 백여 가구 중에서 한 집도 남지 않았으며, 한 세대 수십 명 중에서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고’, 줄곧 1644년까지 유행했다. 영화 ‘대명겁’에서 보여주듯이 신의(神醫) 오우가가 아니었으면 손전정의 군대는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우가는 북경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북경의 전염병이 가장 심했다. 그 당시 북경은 적막하고 스산했으며, 거리와 골목에서 노는 아이도 없었다. 1644년 4월에 이자성이 북경을 포위 공격할 때 북경은 전염병의 습격으로 대항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군사와 전염병의 두 가지 진상이 합쳐지자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기적이 나타났다.

(3) 명나라가 멸망해서 전염병이 갑자기 멈추었나?

이자성의 의병이 베이징에 진입해 환자를 격리했는가? 아니다!

그들은 마스크나 복면을 썼는가? 아니다!

그들은 열심히 손을 씻으라는 안내를 받았는가? 아니다!

그들과 북경 사람들은 사회적 거리를 유지했는가? 아니다!

그들은 북경 거리를 봉쇄하고 백성들의 통행을 금지했는가? 아니다!

그들은 생업을 중지시키고 사회 활동을 멈추게 했는가? 아니다!

당시의 대역병은 흑사병이었는데,[11] 증상을 보면 폐페스트와 선페스트가 합쳐진 ‘혼합 페스트’였으며, 전염력과 위험 등급이 현재의 우한폐렴보다 높았다! ‘숭정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6년(1643년) 수도의 대역병으로 하루에 만 명이 사망했다.”[10] 북경의 사망률은 약 40%에 달했고, 심지어 더 높았다. 북경 교외의 전염병도 아주 심각했다. 통주(通州)에서는 “여름 7월에 큰 전염병이 돌았는데, 명칭은 홀저병(疙疽病)이었고, 집마다 전염됐으며, 늘 온 가족이 죽어 시체를 거둘 사람이 없었다.”

‘명계북략(明季北略)’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명나라의 병과급사중(兵科給事中)이었던 조량직(曹良直)의 집에 손님이 와서 마주 앉아 차를 마시려 했는데, 몸을 굽혀 찻잔을 손님에게 주고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죽었다. 병부(兵部)의 양희래(梁希萊)가 손님을 만나고 급히 집으로 갔는데,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죽었다. 장수 전진명(錢晉明)이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을 끝마치기 전에 죽었다. 잠시 후 부인과 노비 15명이 연달아 죽었다.”

“한번은 두 사람이 말을 타고 줄지어 가면서 한담을 했다. 뒤에 가던 사람이 앞서가던 사람에게 질문했는데, 앞 사람이 말을 하지 않았다. 가까이 가 보니 그 사람은 이미 죽어 있었다. 시체는 여전히 말 위에 반듯이 앉아 있었고, 손에 든 채찍은 여전히 늘어뜨린 채였다.”

“어떤 부잣집은 온 식구가 흑사병에 걸려 전멸했다. 좀도둑 두 명이 기회를 틈타 도둑질을 하러 들어가서, 한 명은 집안에 들어가 보따리를 싸고, 한 명은 처마 위에서 몸을 구부려 보따리를 받았다. 두 사람이 역할을 나누어 협력하는 가운데 처마 위에는 이미 재물이 가득 쌓였고, 아래에도 여전히 많은 재물이 쌓여 있었다. 처마 위의 좀도둑이 보따리를 받아 위로 잡아당기던 중에 두 사람이 모두 갑자기 죽어버렸다. 손에 들린 보따리는 아직 땅에 떨어지지도 않았다.”[12]

이자성의 대군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수도 방어군 3대 진영의 군사는 흑사병으로 너무나 많이 사망해 북경 내외 성벽의 15만4천 개에 달하는 총안(성벽이나 요새의 성가퀴에서 ‘凹’형으로 되어 있는 부분)을 겨우 5만 명이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 대역병 속에서 요행히 살아남은 사병들은 ‘복장이 거지와 같았고’ 항거 능력을 잃은 상태였다.

흑사병은 병균이 옮기는 것이지, 쥐의 몸을 거친 벼룩이 있어야만 전염되는 것이 아니다. 위의 역사적 사실과 현재의 과학 이론이 모두 증명하듯이 흑사병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파되고, 벼룩이라는 중간 숙주 없이 더 빠르고 더 참혹하게 전염되며, 호흡과 접촉으로도 병균이 전파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혼합 흑사병이 크게 유행한 북경 성에서 이자성의 의병은 흑사병 감염이 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31일 후(선페스트의 잠복기 2~8일, 폐페스트의 3~5일을 한참 초과했다)에는 또 산해관에서 오삼계의 군대와 격전을 치를 수 있었을까?!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우리에게 더욱더 깊은 진상을 이성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당시 전염병은 이자성의 의병을 감염시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자성의 군대가 전염병 때문에 청나라 군대에 빠르게 패했다는 ‘가설’은 근거 없는 추측이다. 사료의 기록을 알 필요가 있다. 당시 이자성의 군대는 총력을 다해 싸웠고, 전투력이 강력해 산해관에서 오삼계의 관녕철기(關寧鐵騎)군과 대전을 벌였다. 만약 풍향(일종의 작은 기후 변화)이 돌변해 청나라 대군이 제때 출격하지 않았다면 관녕철기군은 이자성 군에 전멸됐을 것이다. 당시 오삼계의 일부 군대는 필사적으로 싸워도 막을 수 없었고, 일부는 벌써 투항하고 있었다.

청나라 역사에는 이자성의 패잔병이 가는 곳마다 전염병을 옮긴 것도 한 가지 요인이었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청나라 군대가 추격하는 곳마다 전염병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사실 전염병은 일찍부터 그곳에서 유행한 것이지, 가설처럼 패잔병이 옮긴 것은 아니었다. 전염병은 청나라 군대와 이자성이 산해관에서 대전을 벌이는 동안 군사들이 가쁜 숨을 몰아쉴 때 청나라 군대에 옮겨졌다.

사람들이 이해를 못했기 때문에 영화 ‘대명겁’에서 이자성의 군사가 전염병을 옮겼다는 허구가 나온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역사의 진상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도 뜻밖의 일이다. 의병도 명나라 백성인데, 왜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에 전염병은 그들을 멀리했을까?

혹시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집단면역이 형성된 것은 아닐까? 모든 의병에게 면역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2. 현묘한 이치를 과학적으로 재현

(1) 인류에게는 흑사병에 대한 집단면역 방법이 없다

현대 과학에는 흑사병에 대한 세 가지의 ‘과학적 결론’이 있다.

결론 1: “만약 적시에 효과적인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선페스트의 사망률은 75%, 폐페스트의 사망률은 100%다.” 인류가 항생제를 발견하기 전에는 특효약이 없었고, 감염되면 곧 이런 사망률이 나왔다.

결론 2: “인체에는 흑사병 간균에 대해 자연적인 면역력이 없고 쉽게 감염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감염될 수 있다.”

결론 3: “흑사병 완치자는 영구적인 면역력을 얻을 수 있고, 재감염이 아주 적다.”

명나라 말기 대역병의 증상이 알려주는 것은 이렇다. 당시는 폐페스트와 선페스트의 혼합 페스트였고, 전형적으로 호흡기를 통해 전염됐으며, 저항력을 가진 사람이 없어 감염 후에는 아주 적은 사람이 살아남았다. 전염병은 숭정 6년(1633년) 산서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했고, 한쪽이 잠시 주춤해도 다른 쪽에서 일어나며 곳곳을 휩쓸었다. 집단면역이 형성되지 않아 생존자도 저항력을 갖지 못했고, 재발을 막을 수 없었다.

(2) 이자성의 의병이 무신론 뒤집어

그런데 역사적 사실이 세인에게 알려주는 것이 있다. 이자성의 의병은 전염 지역의 명나라 군대를 일소하고도 강력한 전투력을 유지하며 산해관 정벌에 나섰다. 그들은 흑사병이 창궐하던 중국 내륙에서, 그것도 폐페스트에 대해 면역력을 가졌는데, 유일하게 가능한 해석은 바로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다.

상술한 사실은 다시 한번 인류에게 알려준다. 전염병에 정말로 눈이 있어 일정한 감염자를 겨냥해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무신론이 전염병 앞에서 전면적으로 와해한다고 할 수 있다.

3. 군마 방역설은 부분 현상에 미혹된 주장

청나라 군대가 전염병에 감염되지 않은 기이한 현상을 해석하기 위해 어떤 학자는 ‘군마 방역설’을 제기하면서 청나라 군대가 주로 기병으로 이루어져 말의 체취가 벼룩을 쫓았고, 그래서 청나라 군대가 흑사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청나라 군대에도 보병이 있었는데, 왜 보병은 감염되지 않았을까? 명나라 군대에도 기병이 있었는데, 왜 전염병으로 전투력이 급감했을까? 동쪽 정벌에 나선 순나라 이자성의 50만 대군은 주력이 보병이었는데, 왜 감염되지 않았을까?

하물며 방금 말했듯이 쥐의 몸에 붙은 벼룩만 흑사병을 옮기는 것이 아니다. 병균은 예전처럼 대면 대화(비말전염), 상처 접촉, 물품, 화물, 재물 등등으로 사람 간에 전해진다. 게다가 전염병의 참상을 역사 기록에서 찾아보면 당시에는 전파되지도 않았는데 전염되어 사망한 데다, 벼룩에게 물리는 시간이 조금도 소요되지 않았고, 심지어 잠복기도 없었다.

청나라 군대가 줄곧 살인, 약탈, 도시 전체 학살 등을 저지른 사실은 역사에 분명히 기록돼 있다. 그들이 하늘의 도리를 수없이 위배했는데, 어째서 기승을 부리던 흑사병에 걸리지 않았을까?

그것은 하늘에 사무친 명나라 왕조의 죄악 하나가 하늘의 도리를 더 크게 해쳤기 때문이었다. 당시 역사의 진상을 펼쳐보면 현재의 팬데믹에 대한 답안이 열린다….

(계속)

참고문헌

[1] 계육기(計六奇, 명말 청초) <명계북략(明季北略) 12권>

[2] <명실록(明實錄), 숭정실록(崇禎實錄) 17권>

[3] 왕즙(汪楫, 명말 청초) <숭정장편(崇禎長編) 2권>

[4] 장정옥(張廷玉, 청나라) <명사(明史) 본기 23권>

[5] 담천(談遷, 명말 청초) <조림잡조(棗林雜俎)>

[6] 팽손이(彭孫貽) <평구지(平寇志)>

[7] 모기령(毛奇齡, 청나라) <후감록(後鑑錄)>

[8] <명사 본기 24권>: “(숭정) 14년(1641년) 7월, 북경에 큰 역병이 돌았다.”

[9] 오유성(吳有性, 명말 청초)은 <온역론(瘟疫論) 서문>에서 중점적으로 지적했다. “숭정 신이(辛已, 1641년) 해에 역병이 유행해 산동, 절강, 남·북직예(直隶)에서 감염자가 특히 많았다. 오뉴월까지 심해졌고, 온 집안이 전염되기도 했다.”

[10] <명실록 숭정실록 14권> : “(1641년, 숭정 14년 4월) 개봉(開封)에 큰 역병이 돌았다.” “(숭정 14년 7월) 북경의 역병이 심각해 밤낮 사망자가 나왔고, 온 도시가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그때(1643년, 숭정 16년 2월)부터 지금(7월)까지 북경에 큰 역병이 돌아 하루에 만 명이 죽었다.”

[11] 조수기(曹樹基), 흑사병 유행과 화베이 사회의 변천(1580~1644년), <역사연구>, 1997년 제1기

[12] <명계북략 19권>

[13] 허베이성 화이라이(懷來)현 지방지 편집위원회가 제작한 <화이라이현지(懷來縣誌)>, 중국 대외 번역 출판 2001년 8월판.

 

원문발표: 2020년 6월 18일
문장분류: 천인지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6/18/40778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