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응모작품] 창춘에서의 파룬따파(3)

-제3편: 대법홍전(洪傳)

[밍후이왕][창춘에서의 파룬따파(2)에 이어서]

1. 사람으로 전해지고 마음으로 전해지다

대법이 사회에서 널리 전해짐에 명령을 관철하거나 집행하는 행정관리방식이 없었고, 또 상업화된 광고 선전이 없이 사람으로, 마음으로 소리없이 전파됐다. 이렇게 전해질 수 있는 근본원인은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우주의 특성 ‘진선인(眞善忍)’을 전하여 사람의 본성과 양심을 불러 일으켜 생명이 존재하는 진정한 의의―반본귀진의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심성이 승화된 후의 선량한 행위와 육신의 변화가 체현돼 주위 사람도 수혜를 입었다. 그러므로 주변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가족에서 전해지다

2010년 12월 14일, 밍후이왕에 창춘시 파룬궁 수련생이 쓴 ‘파룬따파는 진실하다’는 글이 등재됐다. 작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일가족은 친척이 비교적 많으며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사람도 비교적 많다. 많은 사람은 1994년부터 수련했고, 이전에 수련하지 않던 많은 사람들도 수련인의 육신에 파룬따파가 가져다준 아름다움이 나타남을 보고 잇따라 수련을 시작했다. 어느 날 대략적으로 통계해보았는데 가족 내에서 대략 4대에 거쳐 80여명이 파룬따파를 수련했다. 연령대는 90여세에서 10세 이하 어린이도 있었다. 현재 아직 수련하지 않는 사람도 파룬따파가 좋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박해가 시작되기 전후를 막론하고 수련인이 파룬따파를 실증하는 일을 매우 지지했다. 특히 중국공산당이 박해하는 흉악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파룬따파를 지지했다. 수련하지 않는 친척들이 어찌하여 이렇듯 지지할 수 있었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파룬따파에 대해 매우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많은 수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작자는 친척 중에서 발생된 몇 가지 예를 들었다. 1. 병이 신기하게 제거되고 심신이 건강해졌다. 2. 사부님의 보호로 재난이 없어지고 난이 물러갔다. 3. 심성이 제고돼 사회에 유익했다. 4. 각성돼 대법에 감사드렸다. 이런 4가지 방면에서 친척들이 직접 경험한 사례를 적었는데 매우 진실하고 감탄하게 했다. 이 역시 가족 단위로 모두 대법을 배우게 하는 원인으로, 단지 가족 내에 사람이 많고 적음이 다를 뿐이다.

이웃과 일터에서 보급되다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에서 이런 사례를 말씀하셨다.

“한 수련생이 산동(山東) 모모(某某)시(市) 편직물공장에 다녔는데, 法輪大法(파룬따파)를 배운 후에 다른 직원들에게도 연마(煉)하도록 가르쳐 준 결과, 전 공장의 정신 면모를 모두 이끌었다. 예전에는 편직물공장의 수건을 늘 자기 집으로 하나씩 가져갔는데 모든 직원들이 그랬다. 공을 배운 다음에는 그는 가져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미 집에 가져갔던 것도 도로 가져왔다. 다른 사람들도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누구도 가져가지 않았으며, 어떤 직원 역시 자신이 이전에 가져갔던 것을 모두 공장으로 도로 가져왔는데, 전 공장에 이런 정황이 나타났다.

모(某) 시(市)의 한 보도소 소장이 한 공장으로 法輪大法(파룬따파)를 연마(煉)하는 수련생들의 연마가 어떠한지 보러 갔는데, 그 공장의 공장장이 그들을 친히 접견하며 말했다. 이 직원들이 당신들의 法輪大法(파룬따파)를 배운 후,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면서 상사가 무슨 일을 맡기든지 가린 적이 없고, 이익 앞에서도 다투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전 공장의 정신 면모를 모두 이끌었으며, 공장의 경제효율도 좋아졌습니다. 당신들의 이 공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당신들의 스승님께서 언제 오시면 나도 참가하겠습니다.”

창춘은 더욱 그러했다. 많은 사업단위와 공장, 광산, 대학, 전문대학에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나타났으며 감옥, 노동교양소, 교도소의 교도관 중에도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이 있었다. 심지어 감옥 죄수들도 수련했다. 법을 얻은 후 심성변화는 어떤 교육이나 통제 등의 방법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대법은 본질에서 사람을 개변시키고 있었으며, 또 사람으로 하여금 자각적으로 우주의 특성 ‘진선인’에 동화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车间间休时炼炼功

휴식시간에 작업장에서 연공하다

幼儿园的孩子间操时炼功

유치원 어린이들이 체조시간에 연공하다

사부님께서 국내에서의 학습반을 마치신 후 각 보도소는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를 방영하는 방식으로 9일 학습반을 만들어 인연 있는 사람에게 전했다. 신수련생은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를 시청하고 보도원은 연공동작을 가르쳤다. 이런 학습반은 집에서, 연공장에서, 직장 사무실에서, 회의실에서, 강당에서 진행됐다. 적어도 20여명에서 많게는 백 명 이상이 참가했다. 아울러 이렇게 9일간 설법을 시청하고 공을 가르치는 학습반이 줄곧 순환하며 진행됐다. 여러 직장부서에서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의 실제적인 변화를 보고 모두 매우 지지했으며 조건을 제공했다. 수련생들도 각자의 편리를 이용해 대가없이 대법을 널리 발양하고 사람을 이끌어 법을 얻게 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체를 다했다. 그해 지질전문대학 강당에서 학습반이 연속 진행됐는데 매번 백 명 이상이었다. 학습반은 완전히 무료였고 매우 정규적이었으며 엄숙했다. 법을 배우고 연공하는 사람이 날마다 증가했다. 한 사람이 연공하면 가족 단위로 연공하고, 사무실 단위로 연공했으며 나중에는 전반 사무 청사, 학교, 공장, 광산에서 연공했다. 신 수련생은 법을 얻은 후 자신의 집에서 가까운 연공장에서 연공했다.

2. 각 연공장이 신속히 발전되다

师父亲授吉林大学的法轮旗

사부님께서 친히 지린대학에 수여한 파룬 기

胜利公园炼功点的法轮旗

승리공원 연공장의 파룬 기

1992년 겨울 사부님께서는 베이징에서 돌아오실 때 2개의 파룬 기를 지니고 오셔서 하나는 승리공원 연공장에 주셨는데 이는 사부님께서 직접 창춘에 건립한 첫 연공장이다. 하나는 지린(吉林)대학 연공장에 주셨다. 지질궁, 아동공원, 동식물공원, 조양공원 이런 연공장은 모두 사부님께서 직접 관리하시며 마당을 청리하고 갓을 씌운 곳이다. 사부님께서 동식물공원에 그렇게 크게 범위를 확장했으나 처음에는 겨우 몇 사람이 연공했을 뿐이었다. 사부님께서는 그들에게 조급해하지 말며 좀 지나면 넘쳐날 것이라 말씀하셨다. 정말로 제6, 7기 학습반이 끝나자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1995년 이후에는 사람이 넘쳐났다. 그리하여 동식물공원 내 다른 몇 개의 장소에 연공장을 추가로 개설했다.

승리공원에서 연공하는 노수련생은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매일 아침 2,3시 경에 빗자루나 삽을 들고 승리공원에 갔다. 날은 어둡고 길에는 사람이 없었으며 공원은 더욱 어두웠으나 나는 두렵지 않았고 손전등도 지니지 않았다. 많은 경우에 내가 가장 일찍 도착해 공원에서 연공했고 날이 밝아지면 빗자루를 들고 여러 사람과 함께 마당을 쓸었다. 그때 많은 수련생이 이렇게 했다. 톄베이(鐵北)에 사는 한 할머니는 밤 12시에 걸어서 승리공원에 도착해 연공했다. 한 금전보(金錢堡)의 할머니는 아침 3시에 걸어서 연공하러 왔다.(금전보는 창춘시 시외 지역으로 매우 멀다.) 겨울에 큰 눈이 내리면 수련생들은 눈을 털고 가부좌하고 연공했다. 그때 조건이 좋지 않아 무슨 털 재킷이 없어 솜옷이나 솜바지를 입었다. 그때 마음이 정말로 일치했다! 그때 연공할 때 사부님께서는 후산(猴山) 계단에 계셨고 수련생은 남쪽 수림에서 연공했다.

영하 30도 되는 환경에서 지린대학, 남호공원, 승리공원, 아동공원 등 연공장에는 6백여 명의 사람이 밖에서 연공을 견지했다. 빈허(濱河)지역은 창춘 이통하(伊通河) 동쪽 기슭에 위치해 있었다. 얼음과 눈이 강바닥에 뒤덮였고 넓게 트인 강변에는 서북풍이 불었다. 이곳은 창춘시에서 가장 추운 곳이다. 그러나 빈허 연공장 수련생들은 연공을 중단하지 않았다. 강하게 단련되는 것은 육신이었고 연마되는 것은 의지였다.

胜利公园猴山炼功点

승리공원 후산(猴山) 연공장

长春电影宫炼功点

창춘 영화궁 연공장

1992년 파룬따파는 창춘에서 전해져 인연있는 사람들이 잇따라 들어왔다. 5년 후, 창춘시 연공장은 공원, 길가, 지역사회, 직장과 마을 등의 장소에 개설됐다. 아래는 수련생이 그린 창춘 파룬따파 연공장의 분포도이다. 1994년 이 도면이 그려진 후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보았는가. 매 연공장에 표시된 붉은 원 주위에 나의 법신이 있는 것을. 그림 가운데에 또 큰 법신이 있잖은가.” 처음 이 그림을 그려냈을 때 창춘시 연공장은 단지 30여개였고 연공장마다 사람이 아직 적었다. 1997년, 사부님께서 공을 전하신지 5년이 됐을 때 제2회 미술전의 한 작품에 1997년 대법이 창춘에서 널리 전해진 형세가 반영됐다. 그때 이미 곳곳마다 꽃을 피웠고 없는 곳이 없었다. 그리고 직장 내에, 가정 내에 개설된 연공장은 그려낼 수 없었다. 1999년 사악이 박해를 시작했을 때 공안부에서 창춘시 파룬따파 수련생 숫자를 8만 명으로 통계했다. 사실 소리 없이 수련하는 더욱 많은 사람은 그것들이 통계할 방법이 없었다.

一九九四年长春法轮大法炼功点分布图

1994년 창춘 파룬따파 연공장 도면

一九九七年长春法轮大法炼功点分布图

1997년 창춘 파룬따파 연공장 도면

1994년 4월 25일,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서는 ‘파룬궁 제자가 법을 전하고 공을 전하는 규정’을 발표하셨는데 그중 제4항 규정은 다음과 같다. “일체 法輪大法(파룬따파) 제자는 법을 전하고 공을 가르칠 때, 비용이나, 예물을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 위반하는 자는 이미 法輪大法(파룬따파)의 제자가 아니다.”(대원만법)

이는 수련생들이 각 연공장을 위해 ‘무료로 공을 가르친다.’라는 기를 만들고 있는 장면이다.

3. 대형 연공으로 홍법 활동을 진행하다

长春地质宫炼功点学员晨炼

창춘 지질궁 연공장의 수련생들이 아침 연공을 하는 장면

창춘 문화광장은 전에 지질궁광장으로 불렸으며 창춘시 중심이며 가장 큰 광장이다. 1933년에 설립될 때 ‘순천광장’으로 불렸다. 광장이 만들어진 후 창춘시의 대형활동과 집회는 이곳에서 진행됐으며 시민생활에 큰 작용을 일으켰다. 80년대 초, 광장 동쪽에 도시공공 녹화로 개조됐다. 1996년 8월에 대규모 수리와 개조가 이뤄졌으며 그 후 문화광장으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

문화광장은 창춘에서 파룬따파가 홍전(洪傳)되는 역사를 담고 있다. 사부님의 집은 바로 문화광장 서쪽으로 500미터 되는 곳에 있었다. 사부님께서 초기에 수인(手印)을 하는 사진은 모두 이곳에서 찍었다. 그때 창춘시에서 가장 큰 연공장은 바로 이곳 지질궁 연공장이며 매일 아침 6,7백 명의 사람이 연공했다.

1998년 5월 15일 리훙쯔 사부님께서 공을 전하고 설법한 6주년을 기념할 무렵 국가체육총국 국장이 창춘으로 다녀와 창춘시 시민들이 건강운동을 전개하는 정황을 시찰했다.

그날 문화광장에서 만여 명 군중이 아침 단련을 하고 있었다. 파룬따파 수련생은 6,7천명이었고 5개 연공장으로 나누어 연공했다. 광장의 중앙과 동서남북 빈터에는 모두 ‘파룬따파’, ‘리훙쯔 사부님의 전공(傳功)설법 6주년 기념’이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그 외 파룬따파를 선전하는 사진이 있었다. 파룬따파의 음악이 광장 상공에서 울려 퍼지면서 ‘불광이 널리 비추니 예의가 원명하고도 밝도다.’라는 상서로운 분위기가 나타났다.

长春文化广场每天晨炼都有六、七百人参加

창춘 문화광장에서 매일 6, 7백 명 사람이 아침 연공에 참가했다

체육총국 국장은 파룬따파의 홍대하고 장관인 진영과 아름답고 편안한 연공동작을 보고 매우 흥분했으며 수하 인원들에게 “이게 파룬궁이네.”라고 소개했다.

지린 TV 기자가 현장에서 창춘 보도소 책임자와 인터뷰했다.

그날 지린TV, 16일 창춘TV, ‘창춘일보’, 6월 1일 ‘창춘상보(商報)’ 등 매체에서 잇달아 보도했다. TV프로그램에서 많은 대법 수련생이 연공하는 장면이 나타났다. 5월 25일 지린TV ‘오환기하(五環旗下)’라는 프로그램에서 또 전문적으로 보도했다. 5월 28일 CCTV 1채널과 5채널에서 국가체육총국 국장이 창춘에서 시민들이 아침 단련하는 활동을 주제로 상세한 보도를 진행했다.

1999년 1월 10일, 제9회 전국 동계 체육대회가 창춘에서 열렸다. 이 체육대회를 경축하기 위해 1월 11일 문화광장에서 만 명이 아침 연공을 하여 대법을 발양하기로 했다. 그때 북방 날씨는 매우 추워 다른 방식으로 신체를 단련하는 시민들은 매우 적었다. 때문에 파룬따파의 연공 기세는 더욱 광대하고 순정하게 드러났다. 이날 연공인은 실제로 더욱 많아 문화광장 중심과 광장 남측의 해방로 그리고 동서 양측의 큰길가에도 빼곡히 들어서서 연공했다.

그때 지린성 교육TV 기자가 취재를 나왔다. 취재를 받은 시민 중에는 노교수, 노간부, 박사, 군인 등이 있었으며 또 많은 법에서 수혜를 입은 수련생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수련한 후 심성이 제고된 체득을 이야기했다. 수련생들에게서 나타난 고요하고 상서로운, 평화롭고 선량한, 세상과 다툼이 없는 수련자의 풍모에서 취재하러 온 여기자도 매우 경모하고 감탄했다.

제9회 전국 체육대회가 창춘에서 열렸고 전국 각지에서 운동선수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이번 창춘행이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파룬따파를 듣고 보고 알게 하기 위해 창춘시 일부 수련생은 창춘시 남령 체육관에서 대형 단체연공활동을 개최했다.

동지섣달 추위는 살을 에듯 춥다. 그러나 멀리에서 찾아온 인연 있는 이들을 위해 수련생들은 강추위와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사면팔방에서 체육관으로 모여들었다. 몇 천 명의 대열은 가지런하고 상서롭고 태연했다. 왜냐하면 이때 수련생들은 이미 먹구름이 압박해오는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는 박해가 시작되기 전 창춘시에서 가장 큰 한차례 대형 홍법 연공이며 또 박해 이후 사악이 박해 구실로 언론에 방송된 첫 대형 창춘 대법제자의 연공 장면이기도 하다.

연공이 끝난 후 일부 수련생은 타 지역에서 온 선수들과 교류를 진행해 대법의 아름다움과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주었다. 동시에 또 대법이 중국 대륙의 변방지역까지 홍전된 정황을 알려주었다. 선수들은 성 호텔에 투숙했고 인민광장의 연공 홍법은 줄곧 끊임없이 진행됐다. 선수들이 드나들 때 보게 되는 것은 ‘파룬따파’라고 크게 쓰인 현수막이었고 들리는 것은 은은히 들려오는 연공음악이었다. 저녁에 선수들이 호텔로 돌아오면 일부 수련생은 대법 소식을 실은 신문과 사진을 그들 침실로 보냈다. 아마 이것은 그들이 박해 전에 최후로 정면으로 대법 소식을 접한 것이리라. 아마 수천 년의 기다림, 만년의 기다림이 바로 창춘에 다녀온 이 찰나였으리라.

长春正阳广场炼功点

창춘 정양광장의 연공장

长春客车宾馆炼功点

창춘 버스터미널호텔 연공장

长春西安广场炼功点

창춘 서안광장 연공장

长春人民广场炼功点

창춘 인민광장 연공장

4. 타 지역으로 홍법하다

한 수련생의 고향은 다싱(大興) 안링(安嶺) 깊은 산 속에 있어 교통이 불편했다. 1994년 9월 갑자기 어머니의 병이 위중하다는 전보를 받고 고향으로 떠났다. 의사는 치료할 수 없다고 말했고 가족은 관과 수의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가 집에 돌아간 후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어느 날 밤 어머니는 그를 불러 깨웠다. “내 이불에 도처로 바퀴가 돌고 있는데 색깔이 매우 아름답다. 내가 손으로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구나. 네가 서서 바퀴를 돌리고 있던데 어찌된 일이냐?” 그는 파룬이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가족은 노인의 말을 듣고 모두 법을 배우고 연공했다. 마을 집집마다 대표로 한 사람씩 배운 후 가족에게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이 마을에 30여명이 연공하게 됐다. 그는 또 둘째 형이 살고 있는 마을로 찾아가 그곳에서 40여명에게 가르쳐주었다. 이들은 연공을 매우 열심히 했고 연공에서 많은 공(功)의 상태가 나타났다. 그리고 신체에도 변화가 발생했으며 일부 질병마저 나아졌다.

그는 이 과정을 ‘불광이 다싱 안링을 널리 비추네.’라는 글로 써냈다.

大法洪传到德惠米沙子

대법이 더후이(德惠) 미사자(米沙子)로 홍전되다

师父出生地公主岭

사부님의 출생지 궁주링(公主岭)

大法洪传到榆树

대법이 유수(榆樹)로 홍전되다

프랑스 수련생 토마스 돕슨은 1999년 박해가 발생하기 전에 창춘에서 중국어를 배웠다. 그때 돕슨은 22살이었다. 그의 생각은 매우 간단했는데 영문판 ‘전법륜’이 있었으나 “그렇게 많은 중문 파룬궁 서적을 나는 볼 수 없다. 그리고 많은 법회의 설법과 경문 등을 알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중국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라고 말했다.

法轮功学员法国人托马斯.多布森

프랑스 파룬궁 수련생 토마스 돕슨

돕슨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창춘에 왔을 때 흥미로운 사실은 전반 도시의 거의 집집마다 파룬궁 수련인이 있었다. 거의 집집마다 적어도 한 명의 파룬궁 수련생이 있었다. 할머니, 어머니가 아니면 할아버지, 아버지가 연공했다. 어디로 가든 걸어서 십여 분 거리를 두고 연공장이 하나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연공장에는 대략 2백 명이 아침 5시경에 연공을 시작했고 그리고 7시경에 시작하는 팀이 있었는데 역시 2백여 명이 함께 연공했다. 그리고 각지마다 모두 법공부 팀이 있었다. 그 광경은 그야말로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전반 도시가 모두 ‘진선인’에 따라 하고 있었으며 안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찾았다. 그때 이 일체는 나의 개인 수련과 제고에 매우 강렬한 촉진작용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나는 줄곧 이 일체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바로 이 도시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창 이렇게 실천하고 있었다! 그건 정말로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창춘에서 내가 만난 모든 동북사범대학과 지린대학 교수와 학생들은(파룬궁 수련생들) 모두 나를 도왔었고 인내심 있게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순박한 좋은 사람을 보았다. ‘진선인’에 따라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한 외국 수련생 입장에서 그때 창춘에서의 대법이 홍전된 형세와 수련인이 사회에서 일으킨 바른 작용을 볼 수 있다. 이는 역사의 증거다.

돕슨은 대법을 배우기 위해 중국어를 배우려 했고 창춘에 왔다. 창춘 수련생 중에도 이곳의 수련환경을 소중히 여겨 다른 곳으로 이사하지 않았다. 또 많은 고등학생, 대학본과생, 연구생 수련생들은 ‘전법륜’에서 지린대학을 언급한 적이 있어 지린대학에 지원서를 냈다. 이들은 학교 학생처에 도착 신고를 낸 동시에 즉시 연공장과 법공부 팀에 신고했다. 그들은 모두 매우 총명한 학생들이었으며 청화대학이나 북경대학에 얼마든지 갈 수 있었다. 어떤 학생은 ‘전법륜’을 통째로 외워 법공부할 때 한글자도 틀림이 없이 외워서 공부했다. 그들이 지린대학에 온 목적은 바로 이곳 법공부 수련환경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5. 두 차례 서화전

제1회 서화전

리훙쯔 사부님께서 공을 전하고 법을 전한지 3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95년 5월 10일에서 14일까지 창춘시 고(高)과학기술 청사에서 제1회 서화전을 개최했다.

그때 서법, 국화, 유화, 판화, 목각, 수채화, 천 세화, 자수, 종이 오림, 우승기, 사진촬영 그리고 각종 수공예 작품, 그리고 베껴 쓴 ‘중국파룬궁’(수정본)과 ‘전법륜’ 등 655개의 작품이 전시됐다. 모두 파룬궁 수련생의 작품이었고 작자의 연령은 84세에서 가장 어리게는 6세였다. 5일 동안 6천여 명이 전국각지에서 몰려왔고 그 속에는 또 미국인도 있었다.

제1회 서화전은 창춘 파룬따파 총 보도소에서 진행했다. 전람 기간에 성, 시 기공인체연구회 지도자들도 찾아와 자세히 매 작품을 관람하고 이번의 전시회와 파룬궁에 충분한 긍정을 주었으며 이번의 전시회와 파룬궁에 기념사를 남겼다. 기념사 내용은 리훙쯔 사부님께서 사람을 가르침에 심성을 강조하고 덕을 중시함을 찬양했고 파룬궁은 일종 인민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좋은 공법으로서, 시민들의 심신건강에 유익해 시민들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갈수록 많은 시민들이 받아들이고 있고, 파룬궁을 배우고 파룬궁을 발양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들 지도자들이 관람하고 지도하고 연설하고 기념사를 쓰는 사진은 전부 1995년 7월 18일 제6호 제4면 ‘창춘에서의 파룬따파(내부용 간행물)’에 등재됐다.

首届书画展参观现场

제1회 서화전 전시회 현장

学员天目所见绘制的《早回家园图》

수련생이 천목으로 본 것을 그려낸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라는 작품이다

《法轮大法在长春》(内部资料专刊

‘창춘에서의 파룬따파(내부용 간행물)’의 1995년 7월 18일 제6호 제4면의 일부분이다

제1회 서화전에 수련생이 천목으로 본 것을 그려낸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라는 작품이 있다. 그림은 특별하고 신기한 선경을 그려냈다. 신선이 살고 있는 산이 끊임없이 멀리 이어졌고 금색누각이 휘황하고 금교 옆에는 연꽃이 피어있으며 옥 나무에는 흰 구름이 감돌고 있다. 온화한 에너지로 이루어진 천국세계에서 신불과 보살이 연화대를 딛고 유유자재하고 있다. 이 그림은 사람들에게 그곳이 우리의 진정한 집으로 매우 아름답고 특별한 곳이며 정진하여 착실히 수련해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함을 알려주고 있었다.

제2회 서화전

1997년 5월 10일부터 18일까지 리훙쯔 사부님께서 공을 전하고 설법한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창춘시 남령 체육관에서 ‘창춘 제2회 파룬따파 서화사진전’이 개최됐다.

书画展门前正厅中央的师父法像(学员作品

서화전 홀 중앙에 놓인 사부님의 법상(수련생 작품, 유화)

第二届书画展参观展厅

제2회 서화전 전시장

이번 서화전은 서화계 유명 인사들이 이끌고 창춘 파룬따파 총 보도소가 주최하여 개최됐으며 파룬따파를 발양하고 사람 마음에 있는 선량함을 불러내며 도덕을 승화해 중국의 민족 전통문화예술을 발양하는데 취지를 두었다.

작품 형식이 다양했는데 서예, 회화, 사진, 목각, 종이 오림, 자수, 벽걸이 융단, 우승기 그리고 각종 수공예품 등이 있었다. 전시된 작품은 천여 개였다.

전시회 기간에 ‘리훙쯔 사부님이 공을 전하고 설법한 5주년을 기념하는 서화모임’이 있었다. 서화계 유명인사, 아마추어, 동북사범대학 예술계 학생들 30여명이 참여했다. 대부분은 대법 수련자였으며 사존에 대한 지극한 감사의 은혜를 담아 훌륭한 그림을 그려냈다. 나중에 35미터 되는 종이에 공동작품이 완성됐는데 장관이었다.

미술전이 끝난 후 사부님께서 창춘에 돌아오셔서 대법제자들이 개최한 서화전을 아시고 “공덕이 무량하다, 공덕이 무량하다!”라고 찬탄해마지 않았다.

书画界名家共画长卷

서화계 유명 인사들이 공동으로 완성한 서예작품

书画展结束全体工作人员在运动场合影

서화전이 끝난 뒤 전체 미술전 개최에 참여한 실무자들이 운동장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서화전이 대법홍전에 일으킨 작용은 정말로 가늠하기 어렵다. 관람한 사람 중에 어떤 이는 그때에 대법에 들어왔고 어떤 이는 연분을 맺었다. 지난날 정진하지 않던 수련생들도 촉동을 받아 용맹정진했다. 전시회를 관람한 사람들은 모두 여러 정도에서 고무격려를 받았다. 사부님께서 ‘정진요지-사부를 모시다(拜師)’에서 말씀하듯 됐다. “대법(大法)을 널리 전하니, 소문을 들은 자는 찾고, 얻은 자는 기뻐하는바, 수련자가 날로 많아져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6. 간행물 발행

신문 ‘창춘에서의 파룬따파’

第一期

제1호

第二期

제2호

第六期

제6호

第七期

제7호

창춘 파룬궁 수련생은 신문을 만들어 여러 사람에게 수련 소식을 제공했다. 처음은 8절판 2페이지였고 그 뒤로 4페이지로 확대됐다. 이 신문은 무료로 수련생에게 제공됐으며 수련생들은 이 신문을 친절하게 ‘소보(小報)’라고 불렀다.

1994년 4월 제1호가 발행됐다. 창간사에 이렇게 적혀있다. ‘리훙쯔 사부님은 “창춘에서 6회 학습반을 꾸렸다. 수련생은 4천명에 이르며 실천이 증명하다시피 파룬궁은 인민의 심신건강을 제고하고 두 개 문명건설을 촉진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일으켰으며 매우 좋은 사회효과를 거두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창간 취지에 또 ‘인체과학과 우주의 비밀을 탐구한다.’라고 언급됐으며 이 간행물에 등재된 것은 모두 수련생이 직접 실천으로 얻은 체득이라고 밝혔다.

제1호는 간단히 리훙쯔 사부님과 파룬궁을 소개했다. 첫 면은 ‘파룬궁이 베이징을 뒤흔들었다’, ‘파룬궁이 92년, 93년 동방건강박람회를 뒤흔들었다’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고 많은 실례로 파룬궁의 신기한 공의 효과를 밝혔다. 이 글에서 리훙쯔 사부님께서는 대회에서 ‘대회스타’로, 파룬궁은 ‘명성공파’로 평가됐다고 소개했다. 동시에 리훙쯔 사부님은 ‘특별금상’과 ‘시민들이 환영하는 기공사’로 표창과 명예칭호를 수여받았으며, 93년 동방 건강박람회에서 유일하게 하나밖에 없는 최고상 ‘변연과학진보상’을 수여받았다고 전했다.

첫 면의 가운데에 ‘파룬궁의 기 마당에서 감마선과 열중성자를 측정해 내’라는 글이 실렸다. 중국과학원 고에너지연구소는 LiF(Mg,Ti) 열발광 탐측기로 리훙쯔 사부님께서 설법하는 현장에서 측정을 진행해 감마선과 열중성자를 발견했으며, 이로보아 리훙쯔 사부님이 이렇게 강대한 에너지를 내보내 순식간에 악성 종양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게 아니라고 적었다. 과학적 견해로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기이한 효과의 원인을 해석했다.

1994년 7월 제2호가 발행됐으며 신문은 ‘창춘에서의 파룬궁’으로 바뀌었다. 첫 면에 리훙쯔 사부님께서 전국 각 지역에서 공을 전하고 설법하고 돌아오셔서 밍팡궁(鳴放宮)에서 낮과 저녁으로 대법을 전수하는 2개 학습반을 열어 3,000여 명이 참가한 소식을 소개했다.

기공신문의 기자가 리훙쯔 사부님을 취재하면서 이렇게 질문했다. “파룬궁은 어떤 사람이 수련하기에 적합합니까?” 이에 리훙쯔 사부님은 “제 학습반에는 90여세 노인에서 6세의 꼬마도 있습니다. 고급 지식인도 있고 일반 노동자, 농민도 있으며 또 다른 기공을 연마한 적이 있는 사람도 있고 또 아직 기공을 연마해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총체적으로 다양한 사람이 다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무릇 정상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법을 배우고 연공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2호에는 또 일부 수련생의 수련체득이 실렸다. 어떤 이는 기타 기공에서 파룬궁을 수련하고 파룬궁의 리훙쯔 사부님은 ‘공이 높고 덕이 많으시며 불법무변하다’라고 찬양했으며 자신이 대법을 배우는 목적은 ‘반본귀진’이라 밝혔다. 어떤 이는 배우자마자 천목이 열려 리훙쯔 사부님은 바로 부처이며 전신이 금빛으로 반짝여 황금색으로 가득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파룬궁을 수련해 담배와 술을 끊었고 신체에 기적 같은 변화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1995년 7월 제6호 신문이 발행됐고 이름이 ‘창춘에서의 파룬따파’로 고쳐졌다. 주최단위도 창춘시 기공인체과학연구회 중국 파룬궁 위원회에서 창춘시 파룬따파 총 보도소로 수정됐다.

반년 뒤인 1996년 초, 중앙 ‘기공과 인체과학’의 9명 직원이 국무원 취지에 따라 기공을 국가체육위원회에서 주관한다고 발표했다. 리훙쯔 사부님께서는 가장 처음으로 돈벌이에 취지를 둔 ‘중국기공협회’에서 탈퇴했고 더는 ‘직속기공사’가 되지 않으셨다.

나중에 리훙쯔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북경 노수련생에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국가체육총국에 한번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당시 내가 기공과학연구회에서 탈퇴한 목적은 그런 소위 기공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 소위 기공들은 바로 돈과 재물을 사취하기 위한 것으로, 소위 말하는 몸을 건강하게 할 수 있다는 기공 역시 돈을 위한 것이다. 무슨 기공사 평가를 한다는데 그것은 몇 십 년간 수련해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평가하는 것은 책임지지 않는 것이며 사회에 대해 해로운 것으로 사람의 각종 좋지 않은 마음을 조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사람의 이런 집착심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단호하게 그들과 함께 어울릴 수 없다.” 파룬따파는 사회에서 전해지면서 대법의 바르고 순결하며 불변불파의 형식으로 발전을 유지하면서 중생을 널리 제도했다.

이번 호로부터 ‘소보’는 두 페이지에서 4페이지로 증가됐다. 이번의 ‘소보’는 리훙쯔 사부님께서 공을 전하고 설법한 3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창춘 제1회 파룬따파 서화사진전’을 소개하고 전시된 작품을 등재했다.

1996년 1월 10일 사부님께서는 흔쾌히 ‘창춘에서의 파룬따파’라는 기념사를 써주셨다. 신문 ‘제 호’는 리훙쯔 사부님의 친필로 바꾸었다. 반듯하고 진중하며 빈틈없는 예서체가 눈에 띄게 빛났다. 오른쪽 상단에는 파룬따파의 표기인 파룬 도형이 있었다. 첫 면 우측에 리훙쯔 사부님께서 친필로 ‘창춘에서의 파룬따파’를 쓰시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실렸다.

창춘은 사부님의 고향이며 대법은 이곳에서 전해졌다. 사부님께서는 창춘에서 7회 학습반을 여셨고 그 은혜로운 선택을 받은 사람이 널리 분포돼 법을 배우고 연공하는 사람 숫자가 날로 많아졌다. 사부님께서 제자들의 수련을 지도하고 ‘소보’도 대법 수련의 소중한 역사를 순정하게 기록해나갔다.

다음 ‘소보’의 주제는 법공부하고 수련하는 체득 교류였다. 창춘 보도소는 ‘어떻게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여러분을 인도하여 진정하게 수련하며 착실히 수련할 것인가’, 어떻게 단체 법공부와 스스로 법공부하는 문제, 법공부와 연공의 문제, ‘전법륜’ 공부와 사부님의 기타 설법을 공부하는 문제, 법공부와 교류하는 문제 등 방면의 관계를 바로 할 것인지, 보도원은 어떻게 자아를 내려놓고 ‘한마음으로 수련을 위하고, 한마음으로 대법을 위할 것인지’, 개인 수련에서 어떻게 ‘속인의 마음을 내려놓고 명과 이익에서 걸어 나올 것인지’ 등의 내용이 실렸다. 그리고 해외 수련생이 창춘으로 교류하러 왔을 때 어떻게 대법을 널리 알려나갈 것인지, 자신을 제고하여 더욱 많은 인연 있는 사람이 법을 얻게 할 것인지 교류됐다.

수련생들은 교류 중에서 이미 사부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점차 대법에 대한 이성적인 인식으로 승화됐다.

출판발행부의 지지

출판부의 출판 발행

1995년 8월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파룬따파 의해’가 창춘출판사에서 발행됐다. 책에는 리훙쯔 사부님께서 창춘, 베이징, 광저우에서 파룬궁 보도원을 접견하면서 하신 설법과 해답 내용이 들어있다.

1996년 ‘전법륜’이 베이징에서 베스트셀러에서 첫 자리를 차지했다. 창춘 신화서점에서는 리훙쯔 사부님의 대법서적 ‘전법륜’과 ‘파룬궁(수정본)’이 판매됐다. 그때 서점에서 판매량이 매우 많았고 잘 팔리는 책에 속했다. 그리하여 창춘 신화서점의 판매상들은 매우 놀라워했는데 원인은 중학교 초등학교에 사용되는 교과서를 제외하고 이렇게 빨리 판매되는 책은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지린교육TV에서 방송되다

1999년 지린교육 TV 건강ABC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제9회 전국 동계 체육대회가 창춘에서 열린 즈음에 파룬궁에 대해 여러 방면의 취재와 연속 추적취재 보도를 진행했다. 1월 11일 방송국 기자가 문화광장에서 열린 만 명의 연공장면을 찍고 연공하는 수련생을 인터뷰했다. 그 후 수련생이 직장 환경과 가정으로 들어가 대법을 수련한 후의 변화와 체득을 취재했으며 리훙쯔 사부님께서 공을 가르치는 비디오를 방송했다. 그리고 대학 연구원이 집필한 논문 ‘파룬궁은 심신건강에 대한 효과가 뚜렷하다-창춘시 5백 명 파룬궁 수련자의 심신건강 상황에 대한 연구’도 방송됐다. 이 논문은 1998년 지린성 기공과학논문 보고회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2명의 대학 연구인원은 심리건강 각도에서 파룬궁이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기이한 효과에 대한 이해를 말했다. 그 전에 창춘시에서 대면적인 조사가 진행됐다. 그중에는 연령이 다양한 사람,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 병에 걸린 시간이 길고 짧은 사람, 증세가 가볍거나 심한 사람 등이 포함됐는데 분류를 나누어 분석했다. 이번 연구에서 과학적으로 파룬궁 수련생이 수련 후의 신체변화 수치가 반영됐으며 파룬궁은 ‘진정한 과학’이고 진실함이 실증됐다.

‘난대내외(蘭台內外)’ 잡지에서 보도하다

파룬따파 수련자는 법에서 스스로 수혜를 입으며 아울러 일체 기회를 이용해 자신의 능력에 따라 대법을 발양했다.

‘난대내외’ 잡지는 지린성위원회 당안국의 간행물이다.(국내외에서 공개적으로 발행되며 성2급 간행물임.) 1998년 3월에서 1999년 7월 20일 전까지 세 차례에 거쳐 파룬궁이 창춘에서 널리 전해지는 상황을 소개했다. 보도에는 파룬궁 소식과 길거리에서 연공하는 사진이 실렸고, 제9회 전국 동계 체육대회가 창춘에서 열리는 것을 맞이해 창춘 문화광장에서 만 명이 홍법 연공하는 소식과 사진도 실렸다. 그때 국가 체육위원회 주임이 지린성과 창춘시 일부 관원의 배동 하에 현장에서 시찰하고 인터뷰하는 소식과 사진이 실렸다.

1998년 ‘난대내외’ 잡지의 ‘당신의 건강을 축원한다’라는 코너에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려면 파룬궁을 선택해야 한다.’라는 글과 창춘 파룬궁 수련생이 리훙쯔 사부님의 공을 전하고 설법한 6주년을 기념하는 단체연공 사진이 등재됐다.

7. 국가 체육총국 조사연구팀이 창춘에 오다

1998년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국가 체육총국 기공 평가심사팀 일행 3명이 창춘으로 파룬궁의 상황을 파악하러 왔다. 창춘 보도소 책임자가 보고를 올렸고 조사연구팀은 수련생이 아침 연공하는 장면을 시찰하고 일부 수련생을 취재했다. 20일 각계 수련생 52명과 함께 좌담회를 가졌다.

나중에 조사연구팀 조장 추위차이(邱玉才)는 이렇게 말했다. “조사를 통해 창춘에는 십여 만 명의 파룬궁 수련생이 있으며 층차가 비교적 높다. 열 몇 개의 대학교, 전문대학교의 교수, 박사과정 지도교수, 고급간부가 있으며 그리고 노동자에서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 모두 있다. 확실히 공의 효과가 매우 뚜렷하며 이 방면에서는 이의가 없다….”

“우리는 파룬궁 공법과 공의 효과가 모두 괜찮다고 여기며 사회 안정에 대해, 정신문명건설에 대해 일으킨 효과는 매우 뚜렷하다고 여기며 이 점은 충분히 긍정하는 바이다. 만약 이 공법이 근본에서부터 시민의 심신건강에 이롭고 백성들의 근본이익에 이롭다면 우리는 마땅히 크게 지지해야 할 것이다. 오직 백성들이 옹호하고 백성들의 심신건강에 좋은 점이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지지하고 마땅히 해나가야 할 것이다.”

조사된 녹화 비디오는 그때 사회에서 널리 전해졌다. 비디오에 담긴 파룬궁 수련생의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는 신기한 이야기와 도덕이 제고된 진실한 사례는 사람을 매우 감동시켰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졌으며 이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람이 파룬궁 수련에 들어섰다.

신고 등록하기 위해 국가체육총국에 파룬따파의 태도를 반영해야 했다. 1998년 3월 연구회는 두 권의 책을 편찬했다. 하나는 ‘파룬궁 신체건강 효과에 대한 부분적인 조사’인데 그 속에는 3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그 중 하나는 ‘창춘 파룬따파 수련생의 심신건강 백가지 사례’,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다롄지역과 베이징 모 지역의 대법 수련자의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한 조사보고가 들어있다. 이 책을 여러 사람은 ‘부록 2’라고 간칭했다. ‘창춘 파룬따파 수련생의 심신건강 백가지 사례’는 지린성 각지의 대법을 수련하는 수련생의 심득체험에서 신체건강이 회복되고 도덕이 승화된 내용을 각각 50개 씩 골라낸 것이다. 그 중 병증에 대한 상황이 각기 달랐다. 불치병, 만성병, 오랫동안 치료해도 효과가 없는 병, 돌발성 병 등이 있었으나 연공 후 모두 얼마 안 돼 건강이 회복됐으며 어떤 이는 순식간에 나은 것도 있었다. 몸이 허약한 사람이 건장하게 되고 곱사등이 허리가 펴졌으며, 노인이 젊어지고, 백발이 검은 머리로 된 이러한 사실은 매우 많았으며 정말로 하나하나가 기적 같은 사실이었다. 수련 후 도덕이 승화된 사례는 사람마다 달랐다. 가정이 화목해지고, 돈을 주어도 탐내지 않으며, 뇌물을 거절하고, 선뜻 남을 도우며, 불량배가 좋은 사람이 되고, 사람을 구하고 불을 끄며, 치욕을 참아가며 중임을 맡은 사실, 무명으로 기부하는 등 모두가 하나같이 마음을 닦고 덕을 중히 여기는 사례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아울러 모두 실명이 기록됐으며 대법제자의 원고마다 집주소와 직장, 성별, 연령, 전화번호까지 표시됐다. 편집과정에서 상세한 대조확인이 있었는데 모두 진실하고 오차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