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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변호사의 수련길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법을 얻기 전, 저는 세상의 명리를 모두 비교적 담담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정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특히, 제가 가장 하찮게 보았던 것은 돈이었으며 제일 값어치 없는 것이 바로 돈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돈으로 크게 한 번 곤두박질쳤습니다.

1983년부터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시절 시골 출신이던 저는 갓 중학교를 졸업하고 명문고에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일반 고등학교는 대학에 붙지 못한다는 생각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단순하고 유치하며 또 고집스러웠습니다. 집안 세 아이가 모두 학교에 다녔고 부모님도 시골 출신이어서 부담이 매우 컸습니다. 아버지의 소개로 17세이던 저는 한 금융기관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회계를 배워서 회계일을 7년 하고 신용대출 업무를 6년 했습니다.

열일곱 살에 취직한 1, 2년 뒤, 마을 사람들은 제가 금융기관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그 중 외삼촌댁의 형이 있는데, 동북 지역에 가서 나무장사를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돈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제게 부자로부터 돈을 빌리면 몇 개월이면 갚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돈을 자신에게 빌려주면, 돈을 번 후, 오토바이 한 대를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때, 한 달에 38위안(약 7165원)씩 1년에 5백여 위안(약 9만 4270원)을 벌었습니다. 먼저 4천 위안(약 75만 4160원)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몇 명의 자영업자를 찾았고 그 시절의 부자가 그에게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는 돈을 받은 두 달 후 돈이 부족하다며 3천 위안(약 56만 5620원)이 더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3천 위안을 충분히 못 빌리면 한 번에 물건을 사들일 돈이 부족해 4천 위안도 갚을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염치불구하고 3천 위안을 더 빌려 그에게 보내주었습니다. 그 후, 편지 왕래가 있었습니다. 그는 제게 조급해하지 말라며 물건을 곧 팔 수 있으니 다 팔면 바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편지도 끊고 전화도 불통이었습니다.

이제 곧 연말이 다가오는데 돈도 갚지 않고 그가 사라져 소식이 없어 저는 몹시 초조해졌습니다. 돈을 빌려준 사람도 3개월이라더니 이렇게 반년이 지났는데 빨리 갚으라고 재촉했습니다! 저는 동쪽 벽을 헐어서 서쪽 벽을 보수하는 식이었습니다. 매일 마음에 이 일을 담고 있어 마음이 초조했지만, 또 그들에게 말할 수 없어 하루를 1년 같이 보내면서 뜨거운 가마 속의 개미처럼 매일 짜증스럽고 불안했습니다.

나중에 그의 집에 가서 들어보니 그의 가족은 그가 사기로 5년 형을 선고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은 제게 청천벽력과도 같았습니다. 이렇게 큰 금액은 그때 제 수입으로는 14년 동안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큰돈이었습니다. 돈을 갚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했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저는 심지어 극단적인 방법으로 빚을 갚은 다음 공안국에 가서 자수할 생각까지 해봤습니다.

어느 부잣집 아가씨가 저를 좋아했는데 그녀가 먼저 저와 데이트 약속을 잡았습니다. 저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곰곰이 생각해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번 빚진 일을 그녀에게 이야기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말했습니다. 하나는 제 부모님에게 효도할 것과 다른 한 가지는 저를 도와 빚을 갚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동의했습니다. 그때, 그녀의 아버지는 먼저 제게 4천 위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 저의 마음속에는 늘 억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 인생은 공짜를 탐하다가 사기를 당해 결혼을 팔아 빚을 갚았고, 국가 정책이 두 자녀를 허락하지 않아 아들도 없어 삶의 즐거움과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생은 그저 이렇게 살아야 하니 너무 무능하고 늘 사는 게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자신이 변호사가 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꿈은 저를 삶에 자신감과 희망이 가득 차게 했습니다. 저는 독학 학력 인정 시험을 치러 한 번에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해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이 일을 말하자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발걸음을 내디뎠고 여가를 활용해 고등학교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독학으로 법학과를 졸업하고 한 번에 변호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뼛속 깊이 저는 늘 자신의 천성은 바로 변호사감이며 분명 훌륭한 변호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대법을 얻은 후에야 사부님께서 전에 제게 변호사의 길을 잘 안배해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법을 얻다 

바로 변호사직에 오를 무렵인 1996년에 저는 법을 얻었습니다!

누군가 제게 ‘전법륜(轉法輪)’ 책 한 권을 추천해주었습니다. 저는 한 번 읽어 본 후, 이 책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이 책은 마치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았고 또 무엇이든 모두 이야기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허기지고 목마른 듯 읽기 시작했고, 이것이 바로 제가 찾던 책이고 배우고 싶었던 책이고, 사람이 되는 진정한 목적은 바로 우주 특성 진선인(真·善·忍)에 동화되어 좋은 사람이 되고 최후에는 진인으로 수련 성취하는 것인바,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목표와 의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상이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줄곧 원적할 때까지 온종일 절에서 경을 읽고 가부좌하는 것은 바로 수련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단번에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은 바로 이 법을 위해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수련하면 곧 담배와 술을 끊어야 했습니다. 저는 막 변호사가 되었고 가르쳐주는 선생님은 유난히 술을 잘 마셨습니다. 그와 함께 식사할 때는 술을 마셔야 했고 판사와 함께 식사할 때도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셔야 했기에 확실히 행하기 어려웠으며 반년 남짓 망설였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법을 배울 때, 때때로 술 냄새가 나서 저도 매우 거북했습니다. 나중에 심사숙고한 후, 수련을 결심하고 담배와 술을 끊었습니다. 사부님의 가지로 저는 정말 담배와 술을 끊었습니다. 10년 넘게 피운 담배와 술을 끊겠다고 말하고 정말 끊자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진정으로 수련하기로 마음먹자 아내가 야단이었습니다. 아내는 “당신은 변호사인데 온종일 한 무리의 할머니들과 함께 있으면 창피하지도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저의 책을 찢고 녹음기를 내동댕이치고 카세트테이프를 부쉈습니다. 제가 법공부를 하러 가는 곳마다 쫓아와 소란을 피웠습니다. 한 번은 수련생 집으로 쫓아와 저와 몇몇 수련생이 둘러앉아 법공부를 하는데 아내가 들어와 다짜고짜 저의 운동화를 들고 와서 제 뺨을 후려쳤습니다. 파악하고 때리는 소리가 유난히 커 다른 수련생들도 말리지 못했습니다. 먼저 저는 화내지 않았고, 둘째 맞받아치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연공인(煉功人)으로서,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으며”[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이상하게도 사람들 앞에서 신발 바닥으로 얼굴을 맞았는데 조금도 아프지 않았고 붉게 부어오르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저를 시험하려고 안배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체면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마을에서도, 대인 관계에서도 그렇고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서 신발 바닥으로 뺨을 맞아본 적이 없었는데, 이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습니다.

바로 제가 이해한 수련에서의, ‘당신이 수련하지 않으면 그녀는 당신을 상관하지 않지만, 당신이 수련하기만 하면 그녀는 곧 당신과 맞선다’는 함의와도 같았습니다. 저는 이번 생에는 대법을 배울 것이고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배울 것이며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는 결심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매일 아침 마을 입구에 가서 모든 사람과 함께 연공을 꾸준히 했는데, 아내는 유난히 반대했습니다.

제가 아침 4시에 일어나 나가서 연공하면 아내는 바짝 따라붙어 잡아당기고 때리고 욕하면서 못 가게 했습니다. 길거리로 쫓아오면서 한바탕 때려 옷이 찢어져 망가지고 단추가 잡아 당겨져 떨어졌습니다. 아내를 밀쳐내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연공장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아내는 뒤에서 벽돌 하나를 주워 저의 뒤통수를 때렸습니다. 그때, 머리가 멍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 아내를 보니 안색이 창백해져서 그토록 사납게 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후, 저는 계속 연공장으로 걸어갔습니다…… 아내는 또 연공장까지 쫓아와 소란을 피웠는데 녹음기를 끄고, 현수막을 뜯었으며 저를 밀쳐서 그곳에 서서 연공을 하지 못하게 했고 또 벽돌 하나를 주어와 제 배를 쳤습니다.

아내가 길가를 쫓아오면서 저를 때리고 연공장까지 와서 소란을 피웠기 때문에 이 일은 80대인 친할머니가 알게 됐습니다. 할머니는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고 사부님의 설법을 듣기 좋아해 한가할 때면 집안에 앉아 듣곤 했습니다. 할머니는 “사부님의 말씀이 맞아. 말씀이 참 훌륭하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무렵, 고모와 몇몇 삼촌은 모두 수련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또 와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할머니도 일찍 일어나 일찍이 연공장에 오셨습니다. 아내가 또 연공장에서 저를 때릴 때,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다가와 “내 손주에게 소란을 피우지 마라. 이 대법은 훌륭하단다. 나는 내 손주가 이것을 수련하는 것을 찬성한다”라고 큰 소리로 꾸짖었습니다. 아내는 듣지 않고 계속 저를 밀쳤습니다. 할머니는 앞으로 다가와 아내를 끌어당기자 몸을 돌려 손을 뻗쳐 할머니의 뺨을 한 번 후렸습니다. 할머니도 아내가 자신을 때릴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으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아내는 마치 큰 이득이라도 본 것처럼 깡충깡충 뛰어서 가버렸습니다. 그 후, 아내도 감히 할머니를 때린 사고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아마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내는 친정으로 돌아가 가족에게 말하여 큰오빠와 둘째 오빠를 데리고 할머니 댁으로 예를 갖추어 사과하러 갔습니다. 그때 때린 이후로, 아내는 더는 연공장에 와서 소란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결심을 내리고 연공한 이후, 정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바로 압력이 생기고 저항력이 생기며 심지어 생명의 위험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확실히 두렵지 않았고 게다가 담도 예전보다 커져 밤에 혼자 밤길을 걷고 어디를 가더라도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술을 끊은 후, 한동안 늘 말할 수 없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늘 어떤 것이 몸 안에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사라졌는데 나중에 저는 그것이 ‘술 벌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7년과 1998년 2년 동안, 제가 법을 얻어 수련한 시기 중 가장 좋고 충실하고 착실하며 평안하고 즐거웠습니다.

비바람을 겪다

1999년 4월, 어떤 수련생이 톈진(天津) 경찰관이 사람을 붙잡았는데 연공하는 군중을 붙잡았다고 말했습니다. 책임자가 파룬궁이 어찌 된 일인지 모를 수 있다고 모두 생각했습니다. 우리 연공을 2년 넘게 한 사람들은 국가 책임자들에게 똑똑히 알릴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4월 25일 그날, 이른 아침, 저는 중난하이(中南海) 푸유(府右)가로 갔습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사람이 와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도 책임자에게 진상을 똑똑히 알리려고 청원하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한 번 보고 알아보니 그들 가운데는 초등학교 교사, 초등학생, 국가 간부, 또 정치법률대학 교수, 은퇴한 노인, 나이가 많은 농민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있었으며, 보아하니 대법을 배우는 사람은 분야마다 다 있었습니다.

모두가 대법을 배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모두 자신을 엄격히 요구했습니다. 구호가 없었고, 표어가 없었으며, 앉아 있는 사람 없이 조용히 그곳에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길목과 행인에게 모두 양보했고 교통과 정상적인 생활 질서에 영향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곳에 서 있었는데 그때 어렴풋하게 마치 열차 안에 있는 것처럼 발아래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사이 경찰차 몇 대가 지나갔고 고급 승용차도 있었는데 차량 유리마다 모두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때 재임 중이던 총리가 연공하던 시민 5명을 접견했고 상황을 파악한 후, 톈진에 전화를 걸어 그쪽에서 사람을 놓아주었습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고 돌아갈 때, 자신의 쓰레기를 모두 가져가 바닥은 매우 깨끗했습니다. 밤에 또 한 차례 봄비가 내렸는데, 푸유가의 양측은 깨끗하게 씻겨졌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중국 정부는 이번 집단 청원 사건 처리에 대해 국제사회의 높은 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1999년 7월 20일, 중국 중앙 텔레비전 방송국(CCTV)에서 파룬궁을 ×교(주: 중국 공산당은 진정한 사교)라는 뉴스를 내보내면서 4월 25일, 단체로 중난하이를 공격했다며 사회에 유언비어를 퍼뜨렸습니다. 그때, 저는 이것은 정말 파룬궁을 먹칠하고 사실을 왜곡하며 유언비어를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룬따파는 사람에게 ‘진선인(真·善·忍)’의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는 불가의 8만 4천 법문 중의 한 법문으로서 전혀 무슨 ×교가 아닙니다. 그때 압력은 단번에 닥쳐와 저에게는 유난히 크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2001년 1월 23일, 천안문 광장의 분신자살 사건은 단번에 모든 사람이 거의 대법을 반대하고 대법제자를 반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갑자기 단번에 저는 마치 바닥 밑으로 들어간 것처럼 가족이 반대하고 동료가 반대하며 책임자가 전화를 걸어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TV, 라디오에서는 번갈아 방송을 내보냈는데 그 압력은 정말 산을 밀어 치우고 바다를 뒤집어엎듯 밀려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속으로 대법은 좋고, 진선인(真·善·忍)의 표준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믿지 않으며 천안문까지 몇 번이나 갔었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누구와 말하든지 모두 파룬따파는 좋고 정법 수련이며 라디오와 TV가 모두 유언비어이고 거짓말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국의 책임자가 전화로 저를 찾았지만, 거절했습니다. 그 후, 국장이 또 저를 회의에 참여하라고 불렀습니다. 국 사무실에서 회의가 열려 전문적으로 파룬궁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정책을 전달했습니다. 그때 또 한 수련생이 있었고 우리는 모두 국 회의실에 있었습니다. 사무실 주임은, 정치법률 계통의 관계자들은 파룬궁 수련을 불허한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책임자가 또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후, 책임자는 저에게 발언하게 하면서 의견을 밝히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커서까지 행한 가장 올바른 한 가지 일이 바로 파룬궁 수련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저는 평생, 죽어도 변하지 않습니다”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단번에 1분 정도 냉랭한 분위기가 이어졌고 한 부국장이 지난날의 허장성세를 부리며 “당신들은 책임자를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된다!”라며 대단히 분개하며 말한 다음 회의를 끝냈습니다.

양심을 따지며 바른길을 걷다

장쩌민(江澤民) 집단이 나라와 백성에게 해를 끼쳤던 그 시절은 사법이 극히 부패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변호사로서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으며 꾸준히 법공부와 수련을 하면서 진선인(真·善·忍)으로 자신을 엄격히 요구했고 사실과 법률, 의뢰인을 존중하고 고객을 유치하지 않고 선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판사에게 배구 세터(二傳手: 의뢰인들이 판사에게 선물을 주고 싶을 때 변호사에게 전달하게 함) 역할을 하지 않아 “이 여러 해 동안 고객 유치하지 않고, 선물하지 않고, 담배 피우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어떻게 변호사가 되겠는가?”라며 의뢰인이나 판사도 이해하지 못하고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난처하게 하고 함정을 만들어 의뢰인과 변호사와의 신뢰 관계를 부추겼습니다. 제가 대리하게 된 첫 사건을 신청하자 판사는 회피했습니다. 그 판사는 게다가 재판장이어서 단번에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법정 전체 판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몇 년 후, 판사들은 자발적으로 저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어떤 판사는 “우리와 이야기를 좀 나누지도 않고 재판이 끝나자마자 가시네요”라고 말하면 저는 “당신들은 모두 바쁘니 방해될까 봐서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른 변호사들은 재판이 끝나면 모두 자신들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야기할만한 것이 없고 말해야 할 것은 모두 법정에서 다했다고 했습니다. 또 한번은 퇴근 시간이 되어 한 판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퇴근했으니 밥을 먹으러 가자고 말하면서 “당신이 오늘 나에게 밥을 사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미안합니다. 오늘은 돈을 안 가져왔습니다. 다음에요!”라고 말했습니다.

또 돈을 빌린 사건 하나가 있었습니다. 쌍방은 30만 위안(약 5656만 2000원)을 빌렸고 10만 위안(약 1885만 4000원)의 이자를 약정했습니다. 판사는 저를 단독으로 법원의 CCTV가 없는 방안으로 불러 이 이자를 어떻게 판결해야 하는지 저의 의견을 구했습니다. 저는 그의 눈빛에서 한 가지 물건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지만, 못 본 척하고 쌍방의 약정에 따라 판결할 수 있고, 같은 기간 은행 예금 이율의 4배 외에는 보호하지 않는다는 법률 규정에 근거해 판결할 수도 있으며 모두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저와 사적인 자리에서 별로 이야기할만한 것이 없는 것을 알고는 저를 돌려보냈습니다. 며칠 안 돼, 대출 원금만 갚고 이자는 갚지 않는 것으로 판결이 났습니다. 하하! 대단하죠! 나중에 저는 당사자에게 상소하라고 했고 그는 동의했습니다. 상소 후, 2심 법원은 쌍방의 약정한 10만 위안의 이자를 갚는 것으로 직접 판결을 뒤집어 전승을 거두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무릇 저를 아는 판사라면 제가 대리인의 신분으로 법정에 앉아 있을 때, 그들은 대단히 신중하고 특별히 자세하게 심리하며 잘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 마음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호 감독하고 공동으로 법률을 수호하는 것이 정확한 법 집행자의 인격입니다.

또 한 번은 재판이 끝난 후, 판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제게 “당신은 이 사건을 어떻게 판결해야 하는지 말해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저와 소통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가 참고하도록 자신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저는 이것은 다행히 제가 대법을 배운 덕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진선인(真·善·忍)으로 자신을 요구하고 절대 허위로 날조하지 않으며, 양지와 도의를 지켜 판사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대법의 위엄이고 이것은 대법제자가 실제 행동으로 진선인(真·善·忍)을 펼쳐 보여 준 것입니다.

자비로우시고 위대하신 사존의 구도에 감사드립니다! 법을 얻지 못했다면 그런 환경과 그런 세월 속에서 분명 나쁜 물이 들고 악명을 오래도록 후세에 남겨 놓게 되었을 것입니다!

파룬따파에 대한 저의 인식이 국의 책임자와 불일치한 것은 물론, 어디에서도 대법이 좋다고 말하자 구(區)의 ‘610’은 사법국에 저를 ‘전향반(세뇌반)’으로 보내도록 통지했습니다. 처음 ‘전향반’에 들어갔을 때, 그들이 말한 그런 것을 저는 모두 믿지 않았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체육 위원이고, 학급 간부이며, 집에서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남동생과 여동생을 보살피던 자신은 나쁜 사람이었던 적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법공부를 깊이 하지 않은 탓에 사람의 정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집이 그립고 아내와 아이가 그리웠습니다. 연로하신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두려워 잔꾀를 부려 마음에 어긋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여 자신의 수련에 먹칠했습니다.

세 가지 일을 잘하다

법률을 배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언어 표현력이 비교적 좋았습니다. 저는 대면하는 형식으로 진상을 알려 삼퇴를 권유하기를 더 원했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화제에 들어간 후, 공산사당이 무엇이고 파룬따파는 무엇이며 장쩌민(江澤民) 집단은 왜 파룬궁을 박해하려 하는지 설명했습니다.

시간이 많으면 더 이야기하고 시간이 적으면 적게 이야기했으며 반드시 상대방의 마음속에 닿도록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가장 빠른 경우, 3분 만에 변호사 한 명을 삼퇴시켰습니다! 저는 늘 대면 진상 알리기를 반추해보곤 합니다. 환경과 시기를 잘 파악하지 못하면 억지로 알릴 수 없고, 시간이 부족하고 똑똑하게 말하지 못하면 먼저 알리지 말아야 합니다. 일단 명백하게 알고, 임기응변으로 추세를 따라 해야 합니다. 사실 사부님께서 배후에서 하시는 일이며 뭇신들께서 구도해주고 계십니다. 저는 다만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할 뿐이며 행하는 것만 신경 쓰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한 번 알리기만 하면 통하고 어떤 사람은 반나절 알려도 통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당신이 알리는 것을 듣기만 하면 긴장해 당신이 그에게 태도 표명을 하라고 할 때 그는 확실히 긴장하고 두려워하며 어떤 사람은 눈에 감격의 눈빛이 담겨 있습니다.

납치당하다

2008년 3월 4일, 이른 아침 건물에서 내려와 밖으로 나가다가 아파트 단지에서 검은색 산타나 차량에서 파출소 사람 2명이 내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경찰관이 “아직도 저를 알아보시겠어요? 갑시다. 당신 집에 가서 봅시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무엇을 보시겠다는 말씀이신지요? 저는 법원에 가야 해요. 오늘 제가 출정해서 변호해야 하는 형사 사건이 있어요. 시간이 없어요”라고 말하자 그들은 “안 돼요. 꼭 당신 집에 가서 봐야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두 사람에 의해 끌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잠시 후, 또 7, 8명의 사람이 왔습니다. 경찰이 있었고 610과 아파트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물건을 뒤지기 시작했고 일부 대법 자료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드디어 구실을 찾았다는 듯 더욱 함부로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제게 “갑시다. 우리와 한 번 다녀옵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어디에 가요? 왜 당신들을 따라가요? 저는 오늘 피고인을 위해 형사 사건을 변호해야 하는 법정이 열려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안 된다며 함께 공안국에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무슨 이유로 저를 공안국에 같이 가자고 하는 건가요? 첫째 저는 법을 어기지 않았고, 둘째 죄를 짓지 않았어요. 당신이 저를 공안국으로 가자고 하는데 소환 절차를 밟았나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일단 우리와 같이 갑시다. 거기에 가면 당신에게 절차를 밟아줄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절차가 없다면 함께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저를 밀고 당기면서 산타나 차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산 중턱에 있는 한 리조트로 데려가 한 방 안에 있도록 안배했습니다. 문 입구에 2명의 보안관이 있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먹고 마시며 볼일까지 모든 일을 이 방 안에서 해결해야 했습니다. 610의 관계자는 제게 법률 책을 한가득 가져다주면서 “당신은 그래도 변호사잖아요. 법을 어겼다는 것도 모르잖아요. 잘 배워봐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집을 수색했던 그 경찰관이 다시 저를 심문할 때, 저는 법공부를 한 이후 파룬따파를 법률 방면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자세히 그들에게 한 번 설명했습니다. 그는 “지금은 모두 이렇게 해요. 당신은 법률을 어기지 않았죠. 하지만 이것은 정치 문제에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러면 좋아요. 저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요. 정치적인 요구가 없었다면 프리랜서를 선택하지 않았을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법률적인 입장에서 저를 설득할 수 없었고 오히려 저에 의해 설득을 당했습니다. 수치심으로 부아가 나서 저를 향해 책상을 치면서 눈을 부릅떴습니다. 저는 “당신은 저를 따라 여기에 전혀 올 필요가 없어요. 저는 법을 어기지 않았고 죄도 짓지 않았죠. 당신은 저를 어떻게 하지 못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전향반’에서 무려 27일이나 머물렀고 경찰도 별로 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을 알고 파출소로 데려가 기록을 만들었습니다. 기록에 쓴 것은 당일 일상으로, 오늘 저를 불러와 저와 파룬궁의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당신이 오늘 저를 부른 것이 아니라 27일 전에 납치했습니다.”라고 정정해주었습니다. 그는 “그것은 정부의 일이죠”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물어봤거든요. 그들은 당신들의 일이라고 말했어요. 당신이 오늘 저를 데려온 것으로 말하는 것을 견지한다면 그 이전에 27일은 납치거나, 불법 구금으로 당신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록을 마친 후, 그들은 저를 구치소로 보냈습니다.

구치소에서 30일 머물렀습니다. 이 30일 동안 예심에서 저를 찾아와 두 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구치소에 들어온 이틀째 되던 날 고소장을 써서 경찰관의 납치 또는 불법 구금을 고소하여 예심에 제출하였고 고소의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 기간에 구치소에 있는 동안 그들에게 대법의 훌륭함을 알려주고 전통문화 이야기를 알려주었으며 그들은 모두 매우 듣기 좋아하였습니다.

30일째 되던 날 시 정부에서 제게 하달한 저에 대한 “파룬궁 선전물을 은닉하여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 것”에 관한 노동 교양 2년 결정서를 받았습니다. 결정서를 받은 후, 이것은 정부가 엄중하게 법을 어긴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위법행위가 없었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 행위가 없었으며 집안의 파룬따파 자료는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작용을 갖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한 가지 신앙이고 일반 국민의 진선인(真·善·忍) 파룬따파에 대한 신앙입니다. 국가 헌법에는 국민에게 신앙의 자유가 있다고 규정되어 있으며 시정부는 저의 인신의 자유 2년을 박탈하는 권리가 없습니다.

저는 법률 종사자로서 사회를 위해 법률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맛있는 것을 탐하거나 나태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강제적인 노동 교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저의 업무 성실도와 책임감은 수많은 의뢰인으로부터 호평을 받아왔습니다.

저는 시 중급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자료 초안을 잡고 준비하여 시 중급 법원에 입건하여 시 정부가 저에 대해 발부한 노동 교양의 결정을 철회하도록 했습니다. 행정소송을 제기한 이 사건을 저는 줄곧 4개월 이상 견지해왔습니다. 비록 무슨 하달 문건은 없었지만, 시법원에 시 정부를 고소한 이 행동의 역할과 의미가 매우 커 사악이 놀라 떨게 하는 작용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한 것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고 아직 수많은 사람의 관념을 깨끗이 제거하지 못하였습니다. 앞으로, 저는 더 노력하여 자신을 잘 수련하고 세 가지 일을 잘하여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하며 자신의 서약을 실천하고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자비로우시고 위대하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층차의 한계로 수련생 여러분들께서 자비롭게 바로 잡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22년 1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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