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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이 없어야 신중국이 있을 수 있다

글/ 수줘(舒炪)

[밍후이왕] 중국에서 태어난 중국인은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를 사랑하듯이 ‘당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은 아기일 때부터 사람을 해치기 시작한다. 당은 줄곧 14억 중국인의 ‘어머니’라고 자칭했다.

수년간 적색 세뇌를 받은 많은 중국인은 중공과 중국을 잘 구별하지 못하고 양자를 종종 똑같이 취급한다. 중공의 역대 기만술이 효력을 잃게 되자 중공은 신속하게 전력을 다해 전국적으로 ‘미국 등 서방 세계에 대한 증오’를 주제로 한 애국 깃발을 내걸고 떠들어댔다. 잇따라 샤오펀훙(小粉紅-인터넷상에서 애국주의를 외치는 젊은이들)과 물색도 모르는 국민이 미국을 욕하고 비방하며 적대시하는 것을 본인의 인격 승화와 민족 자존심의 유일한 표현으로 여겼다.

그러나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 엥겔스는 ‘가족, 사유제와 국가의 기원’에서 이미 공산주의의 목적과 취지는 인류의 가족, 사유제와 국가를 소멸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것은 공산당이 일관된 ‘애국’ 선전과는 매우 다르다. 공산당의 애국은 증오의 씨앗이고 악에 대한 구실이다. 그것이 선동한 그럴듯한 구호의 배후에는 각종 꿍꿍이가 있다. 고의로 당과 국가를 동일시한 것은 중공이 중화민족을 납치하기 위한 수법이다.

‘애국’은 양두구육이고 ‘당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그것의 진정한 밀수품이다.

추안핑이 ‘당의 천하’라고 직언해 우파로 몰리다

중공의 이런 자기 마케팅 수단은 정권을 찬탈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벌써 요지경이 벗겨졌다. 중화민국 시기 중공의 거짓 민주화 선전에 속은 유명인 추안핑(儲安平)은 ‘중국의 정국(政局)’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지금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은 국민당 통치하에서는 이 ‘자유’가 ‘많은가’ ‘적은가’ 하는 문제이지만, 공산당이 집권하게 되면 이 ‘자유’는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된다.”

“솔직히 말하면 헌법이든지 아니든지 공산당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 공산당이 진정하게 관심하는 것은 군대와 영역 이 두 가지가 우선이다.”

“공산당은 사람을 대함에 있어 ‘적’과 ‘나’밖에 없다. 그들을 따라다니는 사람은 받아들이고 그들을 따르지 않는사람은 일률로 적대시한다. 인정과 우의라고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을 실제 이익만 따진다.”

중화민국 시기 지식인은 전통사회의 ‘끝까지 간언하는’ 절개와 집과 나라가 바로 천하라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많았다. 자고로 계승해 온 이런 아름다운 인품과 도덕적 풍모야말로 중화민족이 끊임없이 생장하고 번성한 진정한 생명력이다. 이런 정서와 지혜가 바로 ‘애국’의 진면모다. 그러나 이 역시 중공이 의도적으로 공격하고 제거하려는 대상이었다.

추안핑의 ‘당의 천하’라는 발언은 마오쩌둥이 뱀을 굴에서 나오게 유인하는 전술로, 반우파 운동의 중대한 성과다. 추안핑은 곧바로 전국에서 ‘극우분자’가 됐다. 1966년 6월 1일 ‘인민일보’는 ‘모든 우귀사신(牛鬼蛇神: 악질분자)을 쓸어버리자’라는 사설을 발표했다. 8월 31일 유명한 ‘우파’ 추안핑은 여러 차례 잔인한 비판 투쟁을 받은 후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했지만 이루지 못하고 우파로 몰려 93학사로 압송됐다. 1966년 9월 상순, 추안핑은 실종된 후 생사불명이 됐다. 중공의 기록에 따르면, 추안핑은 지금까지 전국에서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지 않은 다섯 명의 우파 중 한 사람이다.

한 차례 또 한 차례 소멸 운동을 통해 이제 파룬궁을 제외하고 중공이 설정한 ‘타도하려는 대상’은 모두 소멸했다. 하지만 파룬궁 수련자들은 생사를 내려놓고 20년 동안 변함없이 평화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파룬궁 진상 알리기를 견지했다.

지식인 계층을 소멸함으로써 중공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제거해 진일보 중국을 납치하기 위한 여론 장애물을 제거했고, ‘애국’을 선동하는 발화점도 점점 낮아졌다.

중공의 유명 연설가 취샤오가 말을 못하게 된 비극

우한 전염병이 발발한 후 지금까지 중공은 전염병 은폐로 인한 국제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우마오(五毛-댓글 하나 달면 50전을 주는 댓글부대)를 동원해 중공을 합리화하고 서방 국가에 죄를 뒤집어씌웠다. 서슴없이 ‘우마오’를 ‘치마오(七毛-70전)’, ‘바마오(八毛-80전)’로 가격을 인상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무료 오찬이 없다.

1949년 이후 중공은 3대 연설가를 강력하게 출범시켰다. 잉커우교육대학의 취샤오(曲嘯) 부원장은 제1위로 중공 화본(話本: 짧은 소설 세트)의 도덕적 시조로 됐다. 한 세기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영화 ‘목마인(牧馬人)’의 모델이 바로 취샤오다. 1951년 취샤오가 19살 때, 그의 아버지가 새해 첫날에 소련군 트럭에 치여 죽자 그는 속으로 소련을 증오했다. 1958년 취샤오는 노동교양을 받았고 문화대혁명 때는 반혁명죄로 옥살이를 했으며 1979년에 석방됐다.

취샤오는 중공의 박해를 깊이 받았지만, 회유도 하고 겁도 주는 중공의 음양 정책에 속아 전국에서 공산당을 합리화하고 칭송하는 보고를 2500차례나 해서 무수한 청년을 속였다.

80년대 후반 중공은 취샤오를 미국으로 파견해 미국 화교와 유학생을 세뇌하는 연설을 하게 했다. 대만을 통일하기 위해 미국에 있는 대만의 친 공산당 역사학자 왕룽쭈(汪榮祖) 교수를 당시 보고회에 초대했다.

취샤오는 연설할 때 슬프고 곡절 많은 인생 경력을 말했다. 22년의 철창 감옥 생활,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감미롭고 감정이 풍부하게 말했다. 슬픈 대목을 말할 땐 눈물을 줄줄 흘리고 처참한 대목은 슬프게 말하다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어머니에게 잘못이 있지만,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하면서 “당은 바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잘못 때렸다고 아이는 원한을 새겨서는 안 됩니다”고 외쳤다. 정보가 봉쇄된 중국에서는 이런 연설이 성공적이었지만 미국에서 취샤오의 연설은 참패했다.

취샤오가 연설을 마친 후 왕룽쭈의 얼굴색은 벌겋게 변했고 갑자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취샤오 교수의 연설이 실제로 피눈물의 고소이고 마디마디 피이고 눈물입니다! 한 청년학자가 이유 없이 22년 옥살이를 할 수 있습니까! 나는 대만에 있을 때 유사한 보도를 봤지만 보도된 사건은 이렇게 사악하지 않았고 절실하지 않았으며 분노를 자아내지 않았습니다.”

왕 교수는 다른 사람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당이 무슨 생모입니까? 이렇게 장기간 자기 아이를 때릴 수 있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생모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계모보다 더 잔인한데 무슨 자격이 있어 학대받은 아이에게 충성하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까? 어머니가 이렇게 자기 아이를 대하면 모든 문명국가에서는 모두 불법이고 법적 처벌을 받습니다.”

왕 교수의 대노에 현장에 있던 취샤오는 얼굴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고 표정이 매우 고통스러웠다.

저우언라이의 전 비서이며 국무원 공무원인 류중하이가 취샤오와 상의했다. “왕 교수는 중국을 이해하지 못해 오해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진실한 보고에 깨어났습니다. 순회 연설을 계속하면 안 되겠습니다.”

취샤오는 중국으로 돌아온 후 활동에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대뇌에 병이 생겨 말하는 능력을 잃었고 2003년에 세상을 떠났다.

중공을 어머니로 삼은 것은 원수를 아버지로 삼은 거나 다름없다. 중공의 편에 서는 것은 애국이 아니라 나라를 망치는 것이고 조만간에 생명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빨리 깨어나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해도 늦는다!

공산당의 사악함이 집안의 허물인가?

중공은 항상 좋은 일을 확대하고 공로를 자기가 점유했으며 나쁜 일은 축소하고 희생양을 찾거나 좋은 것을 나쁜 것과 바꿔치기했다. ‘집안 허물은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가 바로 중공이 바꿔치기해 중국인의 입을 막기 위해 늘 쓰는 거짓말이고, 공산당 바이러스가 중화민족의 매 세포를 침입하는 돌파구이기도 하다. 당신이 이 바꿔치기 하는 말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중공을 중국으로 인정하고 중공의 죄악을 자기 집안의 이런저런 ‘집안 허물’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당의 죄악이 당신 집안의 허물인가?

우한 폐렴 기간, 우한 사람들이 재난을 입은 실제 상황을 기록한 우한 작가의 일기가 최근 해외에서 출판됐다. 일기 전반 면모와 이 작가의 경력에 따르면 작가 자신은 중공 체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고 심지어 중공에 정책 조언을 제공한 것이다. 작가는 일기에 전염병 기간 중공 관료 체제의 일부 부정적인 영향, 우한 사람들의 어려움과 정부 선전이 진실하지 않은 실제 사실을 기록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중공은 이 때문에 일기를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샤오펀훙들의 이유는 ‘집안의 허물은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진상 공개에 대한 중공의 두려움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사람들은 50년대 구소련의 ‘닥터 지바고’ 사건을 상기했다. 1958년 10월 구소련 공식 사이트는 해외에서 출판한 소설 ‘닥터 지바고’에 대해 폭발적인 비판을 선언했다. 소련 작가 파스테르나크는 소설에서 10월 혁명 전후의 일련의 주요 사건을 묘사했다. 소설은 인간성의 시각으로 그 시대의 복잡한 과정을 판단했기에 소련공산당은 홍색 혁명을 평가절하한 ‘세계 최초 정치 금서’로 간주했다.

해외에서 소설이 출판됐고 작가는 노벨문학상을 수여했지만,소련 내에서 ‘애국자’들은 책 내용을 전혀 보지 못했으며루블과 빵을 위해 작가와 책을 비난했다. 파스테르나크는 작가 협회에서 제명됐고 문학상을 받기 위한 출국도 금지됐다. 2년 후 파스테르나크는 슬픔과 외로움 속에서 사망했다. 죽기 전에 그는 ‘노벨상’에 대한 시에 다음과 같이 썼다.

“포위하고 사냥당한 야수처럼 나는 끝장났다. 내가 무슨 몹쓸 짓을 했는가. 내가 살인범이고 망나니인가? 나는 선을 향한 정령이 비열함과 증오의 폭력에 승리할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다”

공산당이 없어야 신중국이 있을 수 있다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 동유럽과 소련의 공산주의가 잇따라 해체되고 냉전 종식을 선고한 것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철저한 실패를 선고한 것이다. 공산주의 종양이 사라진 후 동유럽의 많은 나라, 러시아 및 독립국가연합은 자유와 인간성이 있는 신천지를 맞이했다.

구소련의 평화로운 해체로 전 세계(중국인 제외)는 공산당이 없어야 신천지가 있다는 것을 보았다. 중국인에게는 공산당이 없어야 신중국이 있을 수 있다. 그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기다려볼 수 있다. 지금 과감하게 중공을 이탈한 사람이라야 중공을 따라가지 않고 역사의 내일을 볼 수 있다.

우리 다시 각도를 바꿔 중공이 중국인지를 분별해보자. 중화 문명은 삼황오제가 시대를 열고 하늘의 뜻에 따라 천명을 받들었다. 중공은 서방에서 온 ‘유령’으로서 폭력으로 시작됐고 거짓말로 미화했다. 중화민족의 오천 년 역사는 유구하다. 백 년 홍조(紅朝) 중공의 죄악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중화 신전(神傳) 문화는 유·불·도와 서로 어우러져 빛나고 천지, 생명과 신을 경외한다. 중공은 하늘과 땅, 사람과 싸워 그 즐거움이 끝이 없다고 했고 중국인 8천만 명을 학살했다. 신전 문화는 도덕성을 숭상하고 자기 잘못을 조용히 생각하므로 염황(炎黃) 자손에 속한다. 중공은 마르크스, 레닌의 마교(魔教)를 숭배하고 자기를 시종일관하게 ‘위광정(偉光正-위대, 영광, 정확)’ 하다고 치켜세웠고 사람들에게 혈기(血旗) 아래에서 몸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도록 강요했다. 중화 전통 문명은 바다가 수백 개의 하천을 받아들이듯이 그 포용성이 크지만, 중공은 언론을 통제하고 정신(正信)을 박해했다.

역사의 거대한 변화가 발생하기 직전에 혈관에 중화 혈맥이 흐르는 모든 중국인은 중공을 멀리하고 중공을 탈퇴해 전통으로 회귀하고 진정한 중국인이 되길 바란다.

 

원문발표: 2020428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4/28/40446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