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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형세 하에서 더욱 정진해야 한다

글 / 산동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6월 30일]

정법노정의 끊임없는 발전에 따라 우리 지역의 정황도 일부 변화가 나타났다. 일부 악인에게 이용되었던 소위 행정인원들이 수련생을 대하는 태도가 약간 전변되었는데, 동수의 박해에 대하여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완화된 방식을 채용하였고, 일부 사오한 자들의 표현도 더는 그렇게 떠벌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우리 어떤 수련생은 오히려 자신에 대한 요구를 느슨히 하고 있으며 법공부도 심입되지 못하며 연공, 발정념 할 때에 졸고 있고 진상 알리기도 자주 끊곤 한다. 어떤 수련생은 세간의 이 큰 무대는 대법제자한테 준 것임을 망각하고 있으며 희망을 그러한 당정인원의 진일보로 되는 호전에 기탁하고 있고 그들이 박해를 정지할 것을 기대하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일들에서 사악한테 타협하며 사악의 요구에 배합하고 있다. 법공부와 동수지간의 교류를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형세 하에서 진일보로 사람의 마음을 닦아버려야 하며 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하여 수련해야 할 것을 인식하였다.

사부님께서는 지난해의 법회에서 이미 우리한테 당전의 형세에 대하여 명백히 가리켜주셨다. “현재, 전반 정법의 형세가 끊임없이 앞으로 추진됨에 따라, 표면 공간을 본다면 마치 찌르기만 하면 곧 뚫어지는 듯한 느낌으로서, 이미 아주 적게 남았다. 사악한 생명도 대량적으로 소멸되고 감소되고 있다. 현재 대법제자가 오직 정념이 아주 족한 상황 하에서는, 사악한 생명은 이미 맞설 능력이 없어졌다.” (《2008년 뉴욕법회 설법》)

사악의 대량적인 감소로 인하여 이전에 사악한테 이용되었던 그러한 사람들도 점차 깨어나고 있다. 그들이 진상을 알았던지 아니면 낡은 세력으로부터의 통제가 감소되고 약해져서이던지 우리는 모두 응당 사람의 마음을 지니고 그것에 어떤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들이 과거에 어떤 죄를 범하였던지 우리 동수에 대하여 어떠한 박해를 시행하였던지 이 생명이 능히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음은 바로 우리가 스승을 도와 구도하는 목표이며, 만일 우리가 사람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기대한다면 그들을 해치게 될 것이다. 교훈은 이미 아주 많은데 예를 들면, 크게는 과거의 국가 영도자였고 혹은 일부 관건적인 회의거나 활동이었으며 작기로는 우리가 진상을 알릴 때의 일부 대상이었는데, 모두 우리의 사람 마음의 집착 하에 구도의 기회를 잃게 되었으며 대법제자가 박해받는 시간을 연장하게 되었다.

이외에 이렇게 상대적으로 완화된 환경 하에서 우리는 이렇게 다년간 걸어지나온 수련인으로서 응당 철저히 이러한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며 기다리지 말고 의거하지 말며 신사신법하고 정정당당하게 ‘세 가지 일’을 잘해야 한다. 절대 압력이 작아짐으로 인하여 자신에 대한 요구를 느슨히 하여서는 안 된다. 마침 사부님께서 우리한테 경시(警示)하셨듯이 “과거의 수련인은 일생을 다 소모해야만 비로소 끝까지 걸을 수 있는 길에서 감히 한 시각도 태만(怠慢)하지 못했다. 대법이 구도한 생명의 과위를 성취하려는 대법제자는 수련 중에서 또 가장 편리한 수련법문이 있는데 이런 법을 실증하는 수련의 가장 위대한 영예가 일순간에 지나가는 짧은 수련시간 내에 어찌 더욱 정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하여야 한다》) 사악의 감소와 환경의 변화는 정법이 이미 최후의 최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최후일수록 가능하게 더욱 어려울 수 있으며 우리가 더욱 견정한 의지로 엄숙히 발생된 일체를 대할 것을 요구하며 최후의 길을 완성할 것을 요구한다.

사오한 수련생에 대하여 우리는 응당 앞전의 좋지 않은 일을 논하지 말아야 하며 진정과 성심, 관용과 자비로 그들을 도와야 한다. 사부님의 자비는 비할 바가 없으며 기회를 한 차례 한 차례 길을 잘못 걸은 그러한 사람한테 주고 계신다. 우리는 동수로서 응당 더욱 내심하게 그들과 마음을 열고 교류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천만년의 기다림이 곧 이 홍진만장(滚滚红尘 : 한없이 구차스럽고 속된 이 세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속에서 하루아침에 잘못될 수 있는 것이다. 사오한 자와의 교류를 통하여 나의 느낌으로는 사오한 자는 대부분 법리상에서의 자심생마이다. 천목이 열린 사람은 자신의 공간마당 내에서 수심이화(随心而化)될 수 있으며 자신의 집착심의 팽창으로 자신이 집착으로 만들어낸 일부 마환(魔幻)을 보았고 그로 하여금 법리상에서 이해가 삐뚤어지게 하였으며 집착심이 변화하여 만들어진 함정에 떨어지게 되었고 최후에는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인식이 일체보다 높다고 여기게 된다. 때문에 사오한 자에 대한 도움은 응당 그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하며 그더러 새롭게 법리를 명석하게 알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사오한 자에 대하여 똑같이 사람의 마음을 품고 있어서는 안 되며 교류 상에서 법리와 자신의 체험을 위주로 하여야 한다. 유관되는 기타의 일은 반드시 수구하는 데 주의하여야 하며 기타 동수의 정황을 담화의 내용으로 마음대로 터뜨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부님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 명심하여야 한다. “마음 하나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만 가지 움직임을 제지시킬 수 있다(一個心不動, 能制萬動)” (《최후의 집착을 제거하자(去掉最后的執着)》)

개인의 수련의 체득이며 동수와 교류할 뿐이다. 허스.

문장완성 : 2009년 6월 29일

문장발표 : 2009년 6월 30일

문장갱신 : 2009년 6월 30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원문주소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6/30/2036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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