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聖緣)을 소중히 여기며 비바람 속에서 함께 제고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퇴직한 여교사로 1998년 11월 법을 얻어 수련했습니다. 당시 저는 아직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아들은 타지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설에 집에 왔을 때 저는 아들에게 대법을 소개하며 수련 후 몸의 모든 병이 한순간에 사라졌고 정신이 젊었을 때보다 더 좋아졌으니 이 공은 실로 너무 좋아 끝까지 수련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도 수련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며 가부좌를 틀 수 있는지 시도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아주 수월하게 가부좌를 틀었고 저는 다음 날 아침 아들에게 나와 함께 연공장에 가자고 했는데 평소 늦잠 자기를 무척 좋아하던 아들이 뜻밖에도 동의했습니다.

그날은 마침 소년야(小年夜, 설날을 일주일쯤 앞두고 본격적인 새해를 준비하는 날의 밤)였는데 연공장의 한 열성적인 협조인이 단독으로 아들에게 동작을 가르쳐 줬습니다. 아들은 학교로 돌아간 이후 학교 근처에 연공장이 있고 학교의 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의 반에도 친구 한 명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둘은 함께 연공과 법공부를 하러 다녔습니다. 묘하게도 연공장에 갓 온 젊은 여자 수련생 한 명이 연공 동작을 배우고 싶어 하자 협조인이 제 아들에게 그녀에게 연공을 가르쳐주라고 하면서 “그녀도 너희와 같은 학교 학생이야”라고 말했습니다. 그 여자 수련생은 제 아들보다 1년 후배였는데 그녀가 바로 지금의 제 며느리입니다.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가 그들을 하나로 이어줬고 졸업 이후 각자 직장을 구한 뒤 가정을 꾸렸습니다.

수련의 신심을 확고히 하다

제가 법을 얻은 지 8개월, 아들이 법을 얻은 지 겨우 3개월 됐을 때 중공 악당은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큰 충격을 받았고 직장에서는 대법서적을 제출하라고 핍박하며 강제 전향을 시키려 했고 파룬궁을 연마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수련하는 것이 ‘진선인(眞·善·忍)’ 고덕대법(高德大法)이며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은 틀림이 없다고 확신했고 우리의 굳건한 신념은 변하지 않을 것이기에 사악에 겁먹지 않고 각자 대법의 요구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계속 잘해 나갔습니다. 며느리의 직장에서는 그녀에게 아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권유했지만 며느리는 아들과 뜻이 맞고 모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흔들리지 않았으며 단호하게 제 아들과의 결혼을 선택했습니다. 나중에서야 며느리의 부모, 남동생도 모두 대법을 수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안사돈은 백혈병 말기에 대법 수련을 통해 완치됐다고 했는데 너무 신기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수련의 신심을 더욱 확고하게 해줬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법의 성연이며 우리 두 가족을 하나로 연결해 준 것입니다!

이 박해 속에서 우리는 모두 가혹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아들은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장에서 감시당했고 공무상 출국 기회를 박탈당했으며, 여러 차례 납치되고 구금돼 강제 세뇌로 수련 포기를 핍박받았습니다. 아들이 전향하지 않자 2002년 설 전날 밤 불법적으로 2년형의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습니다. 당시 제 손자가 태어난 지 겨우 한 달 남짓이었습니다. 며느리는 연루돼 강제로 실직당했고 매달 겨우 200여 위안의 생활비만 받으면서도 매달 수천 위안에 달하는 주택 대출금을 갚아야 했기에 저와 남편의 월급에서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타지에서 직장에 다녔는데 사악이 제게 가한 박해 역시 매우 심각했습니다. 대법의 공정함을 되찾기 위해 저는 두 차례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습니다. 한번은 천안문에서 납치돼 현지 세뇌반으로 끌려와 일주일 동안 박해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청원에 성공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부모님 댁에서 납치돼 10일 동안 구금됐고 3천 위안의 벌금을 갈취당했으며 직장에서는 그해 보너스를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610’에 의해 중점 박해 대상자로 지정됐고 이후 사흘이 멀다 하고 중공 직원들이 집으로 찾아와 교란했으며 민감한 시기만 되면 무리하게 납치, 구금됐는데 총 9차례에 달했고 그중 가장 긴 기간은 70일이었습니다.

26년 동안 우리 가족은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고 비바람 속에서 오늘까지 걸어왔으며 매 걸음 사부님의 고심 어린 안배와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그저 몇 가지 일을 돌이켜보며 사부님께 보고드리고 수련생들과 교류하려 합니다.

사부님께서 우리 난제를 해결해 주시다

저와 남편(당시 파룬궁 미수련) 그리고 아들 가족은 각자 다른 두 도시에서 생활했습니다. 이후 어린 손자가 태어나자 저는 2년 일찍 퇴직하고 아들 집으로 와서 손자 돌보는 것을 도왔습니다. 당시 아들은 마침 불법적인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었기에 저는 며느리와 함께 법공부와 연공을 하며 대법제자가 해야 할 세 가지 일을 했습니다. 정기적으로 노동수용소에 가서 아들을 면회했고 지혜롭게 새 경문을 그에게 전해줘 그들 감방의 수련생들이 서로 돌려볼 수 있게 했습니다. 아들이 불법 강제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직장에서 해고당했고 며느리도 직장이 없었지만 그들은 모두 일정한 전문 능력이 있었고 원래 좋은 회사에 다녔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잇따라 외국계 기업에 취업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특수한 신분 때문에 사악이 끊임없이 찾아와 소란을 피웠고 이로 인해 어떤 회사는 계속 고용하기를 두려워해 어쩔 수 없이 직장을 옮겨야 했습니다. 2013년이 돼서야 안정된 직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전염병의 영향을 받아 회사가 여러 차례 구조조정을 했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비교적 안정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어린 손자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순조롭게 다녔고 현재는 외국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다시 제 이야기를 하자면 손자가 태어난 이후 저는 줄곧 아들 집에 있었습니다. 남편은 당뇨병을 앓고 있었고 게다가 지난 세월 가족이 중공 악당의 박해를 받으면서 남편 역시 많은 것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비록 수련은 하지 않았지만 대법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고 있었고 악당의 투쟁 철학과 사람을 괴롭히는 수단이 지극히 비열하다는 사실을 깊이 알고 있었기에 이 문제에 있어 남편은 긍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손자를 돌보는 동안 남편은 혼자 집에 있으면서 출근까지 해야 했으니 역시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손자의 방학 때가 돼 사돈어른이 손자를 데려가면(역시 타지) 저는 집으로 돌아가 남편을 돌봤습니다. 이렇게 오고 가는 생활이 10년 동안 계속됐습니다. 남편이 퇴직한 이후 우리는 그에게도 아들 쪽으로 오라고 권했습니다. 남편은 처음에는 원하지 않았으나 친지들의 설득으로 오게 됐습니다. 아들 집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없었기에 저와 남편은 근처에 방 하나, 거실 하나인 집을 얻어 살았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남편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주변 이웃의 작은 소리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건강이 좋지 않고 성격이 난폭해져 손자의 등하교를 도와주게 했더니 자주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어쩔 수 없다며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제게 난제를 안겨줬습니다. 저 혼자 두 집을 다 돌볼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수련인의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안배하시는 것이고 이곳은 수련하는 가정인데 제가 어떻게 함부로 그들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들과 상의했습니다. 우리가 곤란해하고 있을 때 남편이 생각을 바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우리 난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남편을 안심시키기 위해 저는 방 두 개, 거실 하나인 집을 새로 얻었습니다. 아들 집과 더 가깝고 환경도 개선됐습니다. 이때부터 남편은 다시는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고 집안일도 조금씩 도와줬습니다. 매일 손자의 등하교를 도와주고 아들 가족의 저녁 식사를 해결해 줬으며 저녁 식사 후 다 함께 한 강(講)의 법을 학습할 때 남편도 참여하면서 건강도 다소 나아졌습니다.

이 도시의 집값이 워낙 비싸고 고향의 집은 팔리지 않아 저와 남편은 줄곧 전월세를 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명으로 장쩌민을 고소한 일로 이 구역 파출소 경찰이 집에 찾아와 괴롭혔고 뒤에서 집주인을 위협해 우리를 쫓아내게 했습니다. 그 사람은 연루되는 것을 두려워해 임대 계약을 해지했습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있을 때 원래 부동산 중개인이 마침 같은 건물 14층에 비어 있는 집 한 채를 찾아줬습니다. 여전히 같은 엘리베이터를 사용했고 면적은 원래 살던 집보다 약간 넓었으며 집세는 조금 더 높았는데 우리는 기꺼이 동의했고 이사하기에 매우 편리했습니다. 이것은 사부님의 안배이시며 우리가 여전히 안심하고 수련할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부님께서 또 우리를 도와주셨으니 온 가족이 사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후 파출소 경찰은 우리가 떠나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다시 집주인에게 가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아파트 단지에 집을 구해야 했고 이 역시 그 중개인을 통해 구했습니다. 아직 입주하기도 전에 그 단지의 파출소 경찰이 미리 제게 전화를 걸어왔는데 저는 원래 단지의 파출소 경찰이 통보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진상을 알리며 천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말라, 응보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합법적인 시민이며 거주권이 있다는 등 파룬궁 진상을 말해줬습니다. 그의 태도는 비교적 좋았고 무리하게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가 주민센터 주임과 함께 우리집에 왔을 때 저는 그들 두 사람을 매우 친절하게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장쩌민이 발동한 1억 명이 넘는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박해는 모두 불법이며 나중에 반드시 책임을 추궁당할 것이니 악인의 앞잡이가 돼 나쁜 짓을 돕는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상세히 말해줬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표명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고 몇 년 동안 집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2021년이 되자 우리는 꼬박 10년 동안 집을 빌려 살았기에 저와 아들 모두 더 이상 집을 빌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두 집이 돈을 모아 엘리베이터가 있는 작은 아파트를 샀는데 바로 예전 파출소 경찰이 우리를 쫓아냈던 그 단지였습니다. 다만 층수만 다를 뿐 우리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게다가 호적도 타지에서 이전해 와서 이 시의 주민이 됐습니다. 그 파출소 경찰이 다시 우리를 만났을 때 그는 다소 부끄러워하며 자신도 우리 호적 전입에 동의했고 자신이 서명해 줘서 우리가 들어올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감사를 표했습니다. 우리의 정념정행이 그를 감동하게 한 것입니다.

안으로 닦으며 간격을 없애고 함께 제고하다

2021년 4월 아들은 큰돈을 들여 우리가 집을 사는 것을 도와줬고 자신의 휴식 시간까지 희생하며 인부들에게 인테리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시해 줬습니다. 연말에 우리는 마침내 우리집에 입주했습니다. 수련하는 가정이라 모두 남을 위해 배려했습니다. 첫째는 남편이 외부 소음에 매우 민감하므로 반드시 비교적 조용한 곳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두 집이 서로 편리하게 돌볼 수 있도록 반드시 아들 근처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선택한 곳은 여전히 기존에 세 살던 단지였고 층수만 달랐습니다. 이 역시 기존 부동산 중개인이 찾아준 것인데 제가 아주 일찍 그녀에게 진상을 알리고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를 시켜줬기에 그녀는 줄곧 우리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새집에 입주한 이후 남편은 고향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각종 서적, 각종 운동 기구 등 우리가 보기에는 필요 없는 물건들을 그는 고집스레 들여놓으려 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물건 사기를 좋아하면서도 방 정리는 좋아하지 않았고 벽에 마구잡이로 붙이고 걸어놓아 방을 어수선하게 만들었기에 이 때문에 우리 모두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심지어 아들은 이곳에 저녁을 먹으러 오고 싶어 하지 않았고 서로 간격이 생겼습니다. 저 역시 이 일로 남편에게 자주 화를 냈으며 그가 아들의 헌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집을 제멋대로 망가뜨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와 결혼한 이래 두 사람의 생활 습관은 차이가 매우 컸습니다. 저는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데 그는 줄곧 위생을 안중에도 두지 않아 반평생을 말다툼하며 지냈습니다. 수련 이후 저는 이것이 바로 제 수련 환경이며 더러운 것을 두려워하고 힘든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닦아버려야 함을 인식했고, 이것이 바로 이전에 빚진 업을 갚는 것임을 인식했습니다. 하지만 단지 억지로 참았을 뿐 자비심이 닦여 나오지 않아 때때로 여전히 갈등이 나타났습니다. 그를 곱지 않게 보는 마음이 때때로 불쑥 튀어나왔고 아들이 내 집에 밥 먹으러 오려고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평을 품어 두 집의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이 부분에서 며느리의 인식은 오히려 우리보다 좋았습니다. 법공부와 교류를 통해 각자 안으로 찾았는데 시아버지가 보여주는 모습은 우리가 제고하도록 돕는 것이며 우리가 넘어야 할 고비라는 점을 인식했습니다. 그 속에서 타인을 곱지 않게 보는 마음과 아름다운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의 마음을 닦아버려야 하는데 이곳은 우리가 돌아갈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간격을 없애기 위해 며느리는 아들과 상의해 주말에 우리 두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오게 해 식사를 대접하며 다 함께 속마음을 많이 나눴습니다. 남편도 감동했습니다. 그들이 출근하면서도 우리를 불러서 밥을 먹이니 가정의 따뜻함을 느낀 것입니다. 아들도 아버지에게 자신의 태도가 좋지 않았다면서 고치겠다고 사과했습니다. 저 역시 관념을 바꿔 자아를 닦아버리고 원망과 한탄이 없어야 함을 의식했습니다. 대법제자가 해야 할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 외에 짬을 내어 묵묵히 집안일을 잘해 나갔습니다. 생활 속의 고통과 번거로움을 업을 갚고 심성을 제고하는 기회로 삼았는데 이것이 바로 제가 수련할 내용이므로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제 아들 집은 법공부 팀입니다. 손자는 이 도시에서 대학에 다닐 때 주말마다 단체 법공부에 참여했습니다(현재는 출국함). 가족 외에도 다른 수련생 한 명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멀리 천 리 밖에 있는 사돈어른과 며느리의 남동생도 가끔 이곳에 와서 법공부와 교류를 하고 컴퓨터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곤 합니다. 우리 모두 인터넷을 할 줄 아는데 아들의 컴퓨터 기술이 비교적 좋아 자주 저와 수련생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해 주며 다른 수련생들에게 새 경문을 제공하고 삼퇴 명단을 올려주기도 합니다. 사악의 ‘제로화(淸零)’ 행동 시기 우리는 비록 교란을 받기도 했지만 마음가짐이 바르고 자주 발정념을 했기에 이내 흐지부지 끝났으며 외부의 교란은 갈수록 적어졌습니다.

우리 가족이 오늘까지 평온하게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매 걸음 사부님의 고심 어린 안배와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온 가족이 다 함께 법공부를 하고 정체(整體, 공동체)를 형성한 것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정법이 막바지에 이른 이 마지막 시각에 우리는 더욱 다그쳐 대법제자가 해야 할 세 가지 일을 잘해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를 저버리지 않고 원만해 사부님을 따라 돌아갈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6년 5월 1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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