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법회] 길고 긴 비바람 겪어도 대법제자 된 것 후회 없어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펜을 드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저는 운 좋게 법을 얻어 수련한 지 이미 32년이 되었고, 중공 악당의 산과 같은 탄압을 무릅쓰고 사부님을 도와 정법(正法)한 지도 26년이 되었으며, 그동안 헤아릴 수 없는 고난과 기쁨을 겪었습니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존의 보호 아래 비틀거리면서도 단호하게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장 친근하고 존경하는 사존께 영원히 감사드리고 경배드리며, 선량하고 사심 없는 수련생 여러분께 영원히 감사드립니다! 제22회 중국 대법제자 법회를 맞아 사존께 저의 수련 심득을 보고드리겠습니다.

1. 평생 애타게 찾다 드디어 사존을 뵙다

제 일생은 어릴 때부터 또래보다 훨씬 고달팠습니다. 부모님은 우리 형제를 매우 아끼셨지만, 어머니는 결혼 후 가정 내외의 갈등이 극심해 성격이 매우 나빠지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화를 크게 내시면 기절하곤 하셔서 저는 어쩔 줄 몰라 겁에 질리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착하셨지만 할머니를 닮아 성격이 유약하셨습니다. 15세 때 할머니는 밤길을 가다 놀란 후 정신병을 얻어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타지에서 근무하셨는데, 고모와 단둘이 시골에서 서로 의지하며 사셨고 대약진 운동 때 거의 굶어 죽을 뻔하셨습니다. 살림이 빈곤한 데다 집안 식구와 남들에게 너무 많은 무시를 당해 속이 억눌려 있던 할아버지는 제가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탕산(唐山) 대지진으로 피땀 흘려 지은 새집이 무너지자 정신이 붕괴되어 할머니처럼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가정의 고난이 많았지만 그래도 저는 행복한 편이었습니다. 맏이인 데다 순박하고 배우기를 좋아해 성적이 좋아 부모님과 어른들의 사랑을 비교적 많이 받았습니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병이 위중해 어머니를 자주 때리셨고, 어머니가 견디다 못해 이혼과 가정 파탄의 위기가 있었지만, 모두 저를 좋게 보고 전력으로 학업을 지원해주셨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학비는 할아버지가 대출을 받아 대주셨고, 저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마을에서 첫 대학생이 되었습니다.(나중에 저는 그때 사부님께서 이미 저를 관할하고 계셨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저는 폐렴을 앓았는데, 치료 후에도 해마다 기관지염으로 고생했습니다. 심할 때는 한겨울에 두 번이나 도져 주사바늘 자국이 너무 빽빽해 피부가 헐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간이 비대해지는 병도 있었고 입맛도 없었습니다. 중학교 때는 성적이 상위권(전교 10등까지 함)이었지만, 중3 때 신경쇠약에 걸려 성적이 중하위권으로 뚝 떨어졌습니다. 신체와 가정의 어려움 외에도 저는 2년 동안 학교 폭력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인심이 순박해 친구들의 괴롭힘이 적당한 선에서 그쳤고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성적이 좋고 담임 선생님이 공정하셔서 마음은 괴로웠지만 다행히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상하게도 나중에 괴롭힘이 갑자기 거의 사라졌습니다. 아마 친구에게 빚진 업력(業力)을 다 갚았기 때문일 겁니다.

고등학교 때는 아주 우울하게 살았습니다. 고3이 되자 마음속으로 이대로 노력하지 않으면 고향에 가서 농사나 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밥값을 아껴 참고서를 한 세트 샀고, 고1 과정부터 독학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실에서 졸리면 자고 깨면 공부하면서 1년 만에 전교 문과반 30여 등에서 차근차근 올라가 대입시험에서 전교 1등을 했습니다[나중에 알고 보니 전 현(縣)에서 2등이었습니다]. 중점대학 커트라인을 30여 점이나 넘긴 이 성적은 사실 운이 크게 작용했는데, 이것은 제 인생과 온 가족의 미래에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법을 얻은 후 저는 이것이 사부님의 자비로운 안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일은 저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믿음을 세워주었고, 법난(法難) 속에서 중공 악당의 고압을 견뎌내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두 가지 만성병은 10여 년을 치료해도 별 차도가 없어 양한방 의학에 대한 믿음을 모두 잃게 했습니다. 저는 ‘인생의 이 모든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깊이 생각했습니다. 저는 각종 기공 수련에 심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수확이 있긴 했지만 크지 않았고, 사공(邪功)을 수련해 잘못된 길로 빠질 뻔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기공사에게 정(正)과 사(邪), 부체(附體)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어 겁이 나서 그만두었지만, 여전히 관련 서적이나 불도(佛道) 관련 서적을 즐겨 보며 내심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위대한 사존께서 오셨습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찾아주셨고, 신묘하게 안배하시어 제가 휴직하고 타지로 일하러 가게 하셨습니다. 제가 누군가와 대화할 때 그가 무심코 이곳에 파룬궁(法輪功)이 있는데 배우겠냐고 물었을 때, 저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와 말했습니다. “배우겠습니다!” 나중에 스스로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왜 예전처럼 친구가 기공을 배우자고 할 때처럼 주저하지 않았을까?’

공원 접수처를 찾아갔는데 정원이 다 찼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누님에게 한 자리만 달라고 부탁했고, 그녀는 연락을 기다리라고 하더니 나중에 접수에 성공했습니다.

이때 회장님이 갑자기 저를 찾아 타지로 발령을 낼 테니 당장 출발하라고 했습니다. 명령을 어기면 해고될 수도 있었지만, 저는 정 안 되면 전 직장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기공반을 다 마치고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멍하니 있더니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공안대학에서 사부님의 강의를 듣던 둘째 날, 회사가 또 이사를 가서 아무리 서둘러도 30분 정도 늦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주최 측에 말하니 그는 당신 한 사람 때문에 변동할 수 없다고 했고, 저도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간이 늦춰져 저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원래 근시라 강의를 들을 때 사부님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나중에 운 좋게 공원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사존을 뵙게 되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당시 정말 젊으셨습니다! 마치 20대 같으셨습니다. 체구가 크고 건장하셨으며 표정은 온화하셨고, 제 마음속은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때의 정경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 생각에, 내가 공을 전하고 설법하는 것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장래에 당신은 알게 될 텐데, 당신은 이 시간이 매우 보람찼다고 여길 것이다.”(전법륜) 비록 32년이 지났지만 그 보람참은 정말 사실이었습니다!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는 과연 고덕대법(高德大法)입니다! 법을 얻은 후 10여 년간 저를 괴롭히던 만성병이 1년 정도 만에 완전히 해결되어 저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지극한 법리는 제가 평생 왜 그리 불행했는지 진정으로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전생의 업보가 너무 컸기 때문이기도 하고, 법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밑거름이기도 했습니다. 제 마음도 많이 넓어졌고 사람이나 일을 볼 때 더는 그렇게 융통성 없이 굴거나 옹졸하게 파고들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은 자발적으로 했습니다. 1998년 대홍수 때 직장에서 1인당 50위안씩 기부했는데, 저는 다시 민정국에 가서 50위안을 또 기부했습니다. 당시 지역 수련생 중에는 1000위안을 기부한 분도 있었습니다. 방송국 직원이 취재하고 싶다고 했는데, 당시 월급이 600~700위안밖에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저 자신이 어려울 때도 저는 대법에서 선(善)을 닦으라는 요구에 따라 더 어려운 사람을 가능한 한 도왔습니다. 예를 들어 유랑생활을 할 때, 한번은 수중에 200위안 정도밖에 없었지만 집에 갈 차비가 없는 한 소년에게 61위안(국수 한 그릇 값 3위안 포함)을 주었습니다. 당시 그는 베이징 왕푸징 근처에서 팻말을 쓰고 구걸하고 있었는데 반나절 동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제가 도와주자 그는 매우 감격하여 거리에서 큰 소리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몇 번이나 외쳤습니다.

하지만 수련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성(悟性)이 낮고 수련할 줄 몰라 많은 귀한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법을 얻고 얼마 안 돼 아이가 태어나 고향으로 돌아왔고, 1년 넘게 나가 있었지만 돈은 얼마 벌지 못했고 단지 이 만고에 만나기 어려운 위대한 성스러운 인연만 맺었을 뿐이었습니다! 주위에 수련생이 없어 예전에 배운 기공의 교란을 2, 3년이나 받다가 굳게 결심하고 과거에 좋아했던 책들을 모두 팔아버렸습니다. 1996년 보도소 수련생을 만나 함께 단체 연공과 홍법(弘法)을 하고 나서야 조금 정진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제 파룬(法輪)이 변형되어 수련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내심 무너져 바닥에 주저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낙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무도 제 고통을 몰랐지만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제때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보도원(연공장 책임자)이 위로하고 격려하며 저를 일으켜 세워 계속 장법(樁法)을 하게 했고, 저는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정진하지 못했지만 사부님의 호탕한 은혜를 자주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보도소 활동에 자주 참여하지 못했는데, 한번 가면 꼭 사부님의 새 경문이 막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혹은 경문이 막 내려오면 길에서 우연히 어떤 수련생을 만나 그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직장에서 청나라 동릉(東陵)을 보러 갔을 때, 저는 원래 묘지라 음기가 세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정당한 사유가 없어 갔는데 보고 나니 오히려 느낌이 좋았습니다. 뜻밖에 며칠 뒤 사부님의 시 ‘청나라 동릉(東陵)을 거닐며’가 발표되어 저는 감개무량했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이 일을 회상하며 대법제자의 중대한 사명을 느끼곤 했습니다….

2. 먹구름이 성을 뒤덮고, 베이징에 가서 법을 수호하다

1999년 7월 20일, 사악한 장쩌민은 중공 악당을 이용해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파룬따파에 대한 전대미문의 박해를 일으켰습니다. TV, 라디오, 신문은 위대하신 사부님과 대법을 모함하고 비방하는 내용을 연일 쏟아냈고, 순식간에 먹구름이 도시를 뒤덮고 붉은 공포가 사방에 가득 찼으며, 사람들은 파룬궁 이야기만 나오면 화를 당할까 봐 얼굴색이 변했습니다.

사실 대법제자가 잘 수련된 일면은 어떤 일을 예지할 수 있습니다. 1998년 직장에서 저는 무심코 작은 시를 하나 썼습니다. “일념으로 법선 오르니, 비바람에도 반석같이 굳건하네. 스승님 간곡한 뜻 새기며, 고향 가는 길 순풍에 돛다네. 암초 비껴가고 거센 파도 솟구쳐도, 한마음 되어 조두에 서노라. 봉우리 돌아드니 양안이 넓어지고, 불국(佛國)이 바로 고향이라네.” 박해 이후의 일들을 은연중에 입증한 것입니다.

저는 보도원이자 공무원이었기에 단번에 소위 중점 인물이 되어 직장에서 보낸 사람들에게 엄한 감시를 받았습니다. 많은 여자 수련생이 이미 여러 차례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거나 천안문에서 현수막을 펼치며 사부님과 대법을 위해 정의를 말했지만, 남자 수련생은 가는 사람이 적었고 수련생들끼리 교류해도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대다수는 두려움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아 했지만 이유는 그럴듯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곤혹스러웠지만 나중에 법공부를 하면서 베이징에 가는 것이 옳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수련인은 우선 초범적인 이치에 따라 행해야 하며, 진선인(眞·善·忍) 우주 대법을 수호하는 것은 천지의 도리입니다.

가야 한다고 깨닫긴 했지만 수련 기초가 튼튼하지 못해 두 번 다 거짓 보증서를 쓰고 처분보류로 풀려났습니다.

한번은 저와 보도소 책임자 두 사람이 구치소에서 《홍음》을 외웠는데, 원래 72수 전체를 다 외울 정도로 아주 능숙했지만 우리 둘 다 한 편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나온 후 그가 제게 그게 어떤 시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모른다고 하자 그가 말했습니다. “《진수(真修)》입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진수하라고 일깨워주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거짓 보증서를 썼던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잘하지 못했지만, 다시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수련 상태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준비를 시작했고, 거의 두 달에 걸쳐 《전법륜》 마지막 소절 ‘대근기지인(大根器之人)’을 외웠습니다. 이번에 가면 앞날을 알 수 없고 어떤 결말을 맞을지 몰라 겨우 일곱 살인 딸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딸을 이모할머니 댁에 데려다주고 홀로 단호히 상경하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도중에 경찰의 검문이 심했지만 저는 지혜롭게 통과했고, 천안문에 도착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외쳤습니다. “파룬따파하오!”, “파룬따파는 정법(正法)입니다!”

그 당시 공안이 접수해서 데려와진 후 저는 호된 시련을 겪었습니다. 직장 상사는 압력에 못 이겨 저를 파면하려 했고 아내는 다급해졌습니다. 아내의 직장 상사는 현(縣) 조직부장이었는데 비교적 선량한 사람이라 제가 엄중한 처벌을 받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며 직접 와서 보증서를 쓰라고 권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또 쓸 수 있겠습니까?! 저는 울면서 그의 호의를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심문실에서 아내가 연줄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제 앞에 무릎을 꿇고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자신과 아이를 봐서라도 보증서를 써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저는 정(情)이 너무 무거워 버티지 못하고 울면서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이 광경이 심문하던 경찰을 감동하게 했고, 제 여자 동료가 그의 동창이라 저를 위해 사정했기에 그는 좀 감동한 듯 말했습니다. “당신 아이와 아내가 아니었다면 난 당신 따위는 신경도 안 썼을 겁니다.” 그가 물었습니다. “국가가 왜 파룬궁을 탄압하는지 압니까?” 제가 이유를 묻자 그가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1억 명이니까요. 탄압하지 않으면 내일 천안문 광장의 국기가 당신들 파룬도형이 될 테니까요!”

저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얼마 전 수련생과 대법제자가 과연 1억 명이 되는지 논쟁한 적이 있었는데, 저는 된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둘이 아는 상황으로 추산해보면 아무리 계산해도 모자랐습니다. [현재 역병으로 죽은 사람이 4억이라는 것도 이 문제에 직면해 있는데, 적지 않은 수련생이 입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반신반의하고 있고 개별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심각한 교훈을 통해 사람의 통계 따위는 영원히 신불(神佛)의 말씀보다 믿을 만하지 못함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사부님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고 말했습니다. “보증서 안 쓰겠습니다. 방금 한 말은 취소합니다!”

그 경찰은 깜짝 놀랐습니다. 원래 바로 풀어주려 했는데 결과적으로 풀어주지 않게 되자, 아래층에서 기다리던 아내는 청천벽력 같은 결과에 대성통곡하며 속았다고 생각했고 저를 몹시 미워했습니다. 원래 저는 아내에게 구애할 때 아주 힘들게 쫓아다녀서 그녀에 대한 정이 상당히 깊었습니다. 구세력은 이 점을 이용해 수년 동안 제게 많은 난(難)을 조성했습니다.

하지만 수련은 엄숙한 것입니다. 심성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거대한 난관을 넘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결심에 의지해 저는 구치소에서 겨우 19일 만에 외로움과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또 보증서를 쓰고 나왔습니다. 다시 한번 자신에게 낙담했고 정말 신성한 대법을 수련할 자격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아내가 저를 데리러 왔을 때 저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누구와도 대꾸하기 싫었습니다. 아내는 저를 집으로 데려가지 않고 가장 권세 있는 친척 어른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의 공장에서 잡일을 했는데, 원래 현(縣)에서 저를 파면하려던 것을 그가 서기 등을 찾아가 저를 빼내 준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생각했습니다. ‘안 되면 그냥 좋은 사람으로나 살자. 수련은 너무 어렵다!’ 갈등 속에서 150kg이 넘는 거푸집을 밀다가 발가락을 찧었는데, 한쪽에 지지대가 없었다면 팔다리가 부러질 뻔했습니다. 이것은 제게 아직 업력이나 심지어 생명 빚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천리(天理)는 빚지면 갚아야 하는 것이기에 수련하지 않으면 출로가 없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두 수련생이 명혜편집부에서 발표한 ‘엄숙한 가르침 – —사부님의 최근 담화 기록’를 가져와 계속 수련하도록 격려해주어, 저는 단번에 정념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사부님의 신묘한 안배에 감사드립니다!

두 달 후 친척이 저를 찾아와 보증서를 쓰면 원직장에 복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저와 제 가족에게 20여 년간 베풀어준 사심 없는 도움에 감사드리며 다시는 보증서를 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도 눈물을 흘리며 “자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자네 때문에 화병으로 돌아가셨을 거야…”라고 했습니다. 구세력은 너무나 나쁩니다! 이 박해가 얼마나 많은 중생을 해쳤습니까?!

우리는 다시 대규모로 상경해 청원하기로 상의하고 전 현에서 120여 명이 가기로 동의했습니다. 나중에 정보가 새어 공안이 알게 되어 다들 일주일 앞당겨 출발했습니다. 30~40명은 저지당했고 총 70~80명이 천안문에 도착했습니다. 천안문에 도착했습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또 전 우주의 생명에게 대법제자의 마음 깊은 곳의 외침을 보냈습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중생들이여, 사존과 세세생생 인연을 맺은 중생들이여! 대법제자의 이 피를 토하고 우는 듯한 마음의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이번에 구치소에 갇혔을 때 저는 더는 어떤 환상도 품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쓸 수 있는 연줄은 다 썼고 매번 빼내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큰 사장인 외삼촌도 “내가 살인범을 빼내도 이렇게 어렵지는 않겠다. 다시는 날 찾지 마라. 이건 정치 문제야!”라고 했었습니다.

어느 날 경찰이 갑자기 제게 변호사를 선임하겠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판결을 내리려는 건가?’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물처럼 고요했고 “집에 돈이 없어 선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번에는 보증서를 쓰고 처분보류로 풀려난 것이 아니라 ‘226비준’으로 석방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반복해서 확인해보니 ‘비준’이었습니다. 제자는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존께 큰절을 올립니다!

이 수련 과정을 되돌아보면 그토록 험난하고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물론 구세력이 중공 악당을 조종해 일으킨 박해가 전례 없이 악독하고 사악했기 때문이지만, 주원인은 역시 업력이 너무 크고 평소에 대법에 대조해 착실히 수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난이 쌓여 커지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법에서 답을 찾지 않고 항상 사람의 잔꾀와 당문화(黨文化)의 교활함으로 압력을 줄이고 회피하고 적당히 넘어가려 했습니다. 대법을 수호하려는 마음이 순수하지 않았고, 낙오될까 두려운 마음, 원만하려는 마음, 경찰과 싸우려는 마음, 무거운 인정(人情), 문인(文人)으로서 명예를 좋아하는 마음 등 사람마음이 섞여 있어 구세력이 반복적으로 이용하여 난을 키워 저를 망치려 했던 것입니다.

3. 유랑생활, 경찰 손아귀에서 여섯 차례 탈출

이번에 정념으로 고비를 돌파한 것 구세력의 사악한 안배를 타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훗날 거대한 난관을 돌파하는 심성 기초를 닦아주었습니다. 저는 이제 별일 없을 줄 알았는데, 설날 때 아이 이모할머니가 드물게 우리집에 오셨습니다. 왠지 그녀는 그 일은 말하지 않고 무심코 혼잣말처럼 한마디 하셨습니다. “몇 년 형을 선고받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말이라 저는 당시 누구를 말하는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반응하지 못했지만 무의식적으로 툭 내뱉었습니다. “뭘 근거로 절 건드릴 수 있겠어요? 제가 또 뭘 했다고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대꾸하지 않아 그 일은 지나갔고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좀 이상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일이 터지고 나서야 회상해보니 이것은 사부님께서 그녀를 보내 일깨워주신 것임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심코 한 말이 이미 사악의 안배를 부정했던 것입니다.

설을 쇠고 얼마 안 돼 관할 파출소 지도원 일행 세 명이 집에 찾아와 강제로 저를 경찰차에 태우며 조사하고 알아볼 게 있어서 협조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그럴 자격이 없으며 저는 어떠한 위법 행위도 하지 않았다고 따졌습니다. 그는 당신이 ‘처분보류’ 상태라고 했고 저는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파출소에 가서 소장과 계속 논쟁하니 그는 “나한테 말할 필요 없고 내일 법제과 사람들과 얘기해”라고 했습니다. 저는 ‘큰일 났구나!’ 싶었고, 사악이 저를 노동교양(강제노동) 보내기로 작정했음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마음속으로 급히 사부님께 청했습니다. ‘사부님, 저는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발 제자가 갈 수 있게 안배해주십시오.’

그래서 나이 든 경찰 한 명이 저를 남쪽 구금실로 데려갈 때 쓱 훑어보니 대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갑자기 뛰었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악질 경찰은 끝내 쫓아오지 못했고, 저는 유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컴퓨터를 배우고 해외 메일 계정으로 명혜망 자료를 다운로드하여 진상 자료를 배포하며 소중한 중국인을 구했습니다.

이 기간에 또 중대한 시련을 겪었는데, 아내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처남을 통해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조건은 아이는 아내가 맡고, 두 사람의 유일한 재산인 중고 주택(약 4만 위안 가치)을 반반씩 나누되 제 몫은 아버지로서 아이 양육비로 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저는 가정이 파탄 나고 빈털터리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의 태도는 매우 강경했습니다. 그녀의 처지가 고달픈 것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고(직장에서 2등 시민 취급을 받고 차별과 따돌림을 당하며 남들은 다 월급이 올라도 그녀는 안 올려줘서 주관 부부장에게 호소하니, 부장이 간부들도 압력이 커서 그녀를 전출시키지 않은 것만도 쉽지 않다고 했답니다), 또 저는 대법제자로서 인간세상의 모든 것을 어쨌든 다 버려야 하기에 서명해주기로 했습니다.

동시에 저도 딸에게 미안했고 아버지로서 책임은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말했습니다. “집은 당신이 갖고 아이 양육비는 내가 계속 낼게. 우리 딸이 18살이 될 때까지.” 아내는 듣고 매우 의외라며 감동하여 저를 안고 크게 울었고, 그 후로는 이혼 문제를 다시 꺼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속인은 어디까지나 속인이라 정말 높은 요구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명절에 장모님 댁에 두 모녀를 보러 갔는데, 처남이 무서워하며 저를 받아주지 않고 빨리 가라고 쫓아내며 순찰대가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깊은 밤에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아내는 옆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제가 여러 번 쳐다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외롭게 길을 걸으며 의지할 곳 하나 없고 몸 둘 곳 없는 처지에 마음이 한없이 처량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며칠 전 사부님 안배로 새로 알게 된 몇 리 밖의 수련생이 생각났습니다. 마당이 큰 그의 집을 찾아가자고 생각했습니다. 수련생은 저를 따뜻하게 받아주었는데 정말 가족보다 더 친근했습니다!

두 번째 탈출은 협조인 집에서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여전히 적지 않은 문제가 존재해 그녀가 사악에게 허점을 잡혔고, 두 파출소 경찰이 갑자기 그녀의 아파트를 포위했습니다. 경찰은 방범문을 열지 못하자 용접공을 불러 강제로 절단했습니다. 불꽃이 튀는 것을 보고 저는 어두워지면 나가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들 어렵게 창문 쇠창살을 뜯어냈고, 저는 미련하게 신발을 먼저 벗어 던진 다음 3미터가 넘는 2층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 결과 한쪽 발을 삐어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급히 북쪽으로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붓고 힘을 줄 수 없어 보름 만에야 나았습니다. 뜻밖에 북쪽 맞은편 병영에서 보초가 총의 노리쇠를 당기며 “누구냐? 서라!”라고 했습니다. 저는 허둥지둥 낮은 담을 넘었는데 병영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4~5명이 쫓아와서 헐떡거리며 담을 몇 개나 넘어 겨우 사악의 추격을 따돌렸습니다.

세 번째는 버스를 기다리다 진상 스티커를 한 장 붙였을 때였습니다. 주위의 오토바이 택시 기사 등이 구경했는데 뜻밖에 그중 한 기사가 사복 경찰이었습니다. 그는 젊고 다리가 길었는데 미친 듯이 저를 쫓아왔습니다. 저는 그보다 빨리 달리지 못해 근처 파출소로 납치됐습니다. 먼저 이름과 주소를 물었지만 일체 말하지 않아 악질 경찰에게 마구 구타당했습니다. 또 한 경찰이 전기봉으로 저를 가볍게 두 번 찔렀는데, 이 사소한 일이 단번에 제 마음속의 전기봉에 대한 공포 관념을 깨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전에 수련생에게 듣기로 어떤 수련생이 전기봉 네 개로 지짐을 당할 때 “악악”거리며 비명을 질렀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저녁 먹고 돌아와 의자 다리로 제 엄지발가락을 누르고 발부터 목까지 계속 전기 충격을 가할 때, 저는 이미 두렵지 않았고 눈을 감고 끊임없이 법(특히 《홍음》) 속의 시를 외웠습니다.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번은 전기 충격을 가하는데 갑자기 몸이 하나도 괴롭지 않았습니다. 눈을 떠보니 이 전기봉이 ‘파직파직’ 불꽃을 튀기며 작동하고 있는데 제 이쪽 몸은 아무런 감각이 없어 속으로 뛸 듯이 기뻤습니다. ‘전기봉이 고장 났구나!’ 하지만 환희심이 일자 다시 안 되어 다음번 충격은 여전히 아주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번에 자신감이 배가되었습니다! 나중에 전기봉 배터리가 다 닳자 그들은 두 사람이 저를 쇠의자에 수갑 채워 놓고 옆에서 자면서 지켰습니다.

심문할 때 우두머리가 저를 알아봐서 큰일 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곧 노동수용소로 보내질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부님께 청했습니다. ‘사부님 가지(加持)해 주십시오. 저는 반드시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손오공을 배워 잠든 경찰에게 졸음 벌레를 던져 깨어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수갑이 움직이면 쇠의자에서 소리가 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갑 한쪽을 가볍게 빼냈지만 다른 한쪽은 아무리 해도 빠지지 않아 생각했습니다. ‘만약 갈 수 없다면 사부님께서 이 수갑을 빼게 하지 않으셨을 거야!’ 이를 악물고 다른 한쪽도 빼냈습니다. 급히 문을 열려는데 문이 도무지 열리지 않아 밖에서 열쇠로 잠근 게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했습니다. ‘만약 갈 수 없다면, 사부님께서 수갑을 빼게 하지 않으셨을 거야!’ 냉정하게 살펴보니 돌리는 손잡이가 있었는데, 몇 년 전 본 적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문을 나선 후 태연한 척 서두르지 않고 층계를 내려왔는데 문지기가 검문하면 어떻게 대응할지 걱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지기 방에 불은 켜져 있는데 사람이 없었습니다! 문을 나선 후 모퉁이까지 가서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어 그대로 달렸습니다.

6~7리 길을 걸어 어느 마을의 수련생을 찾아갔는데 한 번밖에 안 가봐서 길을 잘못 들어 문을 두드려 물어보니 아니었습니다. 할 수 없이 동쪽으로 몇 리를 더 걸어 개인 의원을 하는 고등학교 동창을 찾아가려 했습니다(사실 그의 의원은 마을 근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때 너무 지쳐 걸을 수가 없어 국도 북쪽의 주유소로 가서 의원이 어디냐고 물으려 했습니다.

이때 승용차 한 대도 뒤에서 주유소 쪽으로 오길래 저는 무심결에 주유하러 가나 보다 하고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차가 갑자기 멈췄고, 고개를 숙이고 걷던 저는 누가 머리를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즉시 고개를 들었는데, 차 문이 열리며 굶주린 늑대 같은 눈빛 여섯 개가 저를 덮쳤습니다!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아! 경찰이구나!”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급히 몸을 돌려 뛰어 국도 남쪽 도랑으로 굴러 내려갔습니다. 뒤돌아 그 차를 보니 후진한 뒤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길래 저는 급히 서쪽으로 뛰었습니다.

큰 공장 건물을 발견하고 급히 뛰어들어가 방을 찾아 숨으려 했지만 안에는 잡초뿐이고 숨을 곳이 없었습니다! 저는 숨을 헐떡이며 담벼락 밑에 서서 걱정했습니다. ‘3미터 넘는 담인데 도구도 없이 어떻게 넘지? 경찰이 입구를 막으면 독 안에 든 쥐 꼴이 될 텐데.’ 하지만 생각을 돌렸습니다. ‘만약 갈 수 없다면 사부님께서 파출소에서 나오게 하지 않으셨을 거야!’ 자신감이 크게 생겨 상관하지 않고 담벼락을 따라 계속 뛰었습니다.

과연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희망이 보였습니다! 하수도관 하나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고 저는 그것을 통해 ‘쑥’하고 빠져나갔습니다. 남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 철도망을 넘으니 큰 연못이 보였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그 세 경찰이 연못가까지 쫓아왔는데, 제가 진상을 알릴 때 열심히 듣던 그 경찰이 한마디 했답니다. “쫓지 마, 수갑도 풀고 도망친 놈인데 우리가 못 찾아, 돌아가자.” 정말 위험했습니다! 제자는 위대하신 사존께 큰절을 올립니다!

이 사건은 현지 공안국을 놀라게 했고 경찰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그 녀석 공능(功能, 초능력)이 생겼어!” 나중에 제가 협조인을 따라갔다가 경찰에게 납치되어 세뇌반에 갔을 때, 전향을 담당한 공안국 부국장이 제게 소리쳤습니다. “네 녀석 소문이 꽤 신통하더군. 공능이 생겼다면서? 무슨 공능인지 나한테 좀 보여줘 봐!” 그가 만만하게 생각지 못한 것은, 경비가 삼엄한 세뇌반에서 제가 두 번의 탈출 실패 후 마침내 13일째 되던 날(세뇌반 1기는 15일이고 전향 안 하면 강제노동을 보냄), 사존의 자비롭고 치밀한 보호 아래 세 번째 만에 호랑이 입에서 순조롭게 탈출했다는 것입니다!

이번 탈출도 조마조마하고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면 관계상 상세히 기술하지 않겠습니다. 도망칠 수 있었던 원인을 요약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 앞서 두 번의 탈출 실패가 강렬한 두려움 때문임을 발견하고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가?’라고 생각하니 서서히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둘째, 마음이 마침내 흔들리지 않았고, 노동수용소에 가서 혹형과 전향을 견디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던 마음을 드디어 내려놓아 단호히 보증서를 쓰지 않았습니다. 셋째, 저를 밀고한 수련생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고, 아마 제가 전생에 그녀를 밀고했나 보다 생각하며 그녀를 매우 안타깝게 여겼고, 그녀가 언제쯤 빨리 깨달아 반성문을 쓸지 걱정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나간 지 일주일 정도 만에 깨달았습니다.)

또 두 번은 설에 집이 그리워 몰래 처와 딸을 보러 갔을 때입니다. 감시망이 있었는지 밥을 먹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아내가 드물게 재치를 발휘했습니다. “경찰이야!” 저는 깜짝 놀라 급히 몰래 지붕으로 도망쳤습니다. 또 한번은 수련생 집에 갔다가 막 문을 나서려는데 공교롭게도 앞에서 언급한 그 파출소 지도원이 수련생을 찾으러 갑자기 와서 하마터면 막힐 뻔했는데, 기회를 봐서 몰래 빠져나갔습니다. 그중 한 번 도망칠 수 있었던 원인은 미리 꿈을 꿨기 때문입니다. 꿈에 두 경찰에게 납치됐는데 그중 한 명이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그에게 풀어달라고 했지만 소용없었고 어느 현(縣) 간부 앞으로 끌고 가자, 한 악질 경찰이 제 가슴을 맹렬히 걷어찼는데 제 두려움이 순간 사라지며 정법 구결을 크게 외쳐 미리 다른 공간의 사악한 요소를 해체했습니다.

2년의 유랑생활 동안 저는 이집 저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수련생 집에서 지냈으며, 생활은 주로 수련생과 친척 몇 명의 도움에 의지했습니다. 비록 떠돌아다니며 고독하고 외롭고 때로는 놀란 새처럼 불안했지만, 수련생들은 가족보다 더 친근하게 생활을 매우 세심히 보살펴주었을 뿐만 아니라, 무한히 신뢰하여 무슨 속마음이든 다 터놓았고, 법리상에서 끊임없이 교류하고 격려했습니다. 또한 함께 협력하여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일을 적지 않게 하여, 저는 대법의 위력과 은사님의 자비를 깊이 느꼈고 심성이 크게 제고되었습니다. 명혜망 지면을 빌려 저를 사심 없이 도와주신 모든 수련생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아버지 친구분이신 노수련생 집에서 몇 달간 지낸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슴에 새겨져 잊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 집 컴퓨터는 조립식 구형 데스크톱이라 인터넷이 아주 느렸습니다. 당시 노트북 속도가 초당 3KB 남짓이었는데 그 집은 1KB 남짓이었습니다. 저는 자주 조바심이 났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다들 심성이 비교적 좋았는지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인터넷 속도가 갑자기 6KB 이상 나온 것입니다! 다른 노트북은 여전히 3KB 남짓이었습니다.

어느 날 깊은 밤, 저는 그 집에서 사존께서 막 발표하신 《북미순회설법》을 다운로드해 읽다가 몸이 전율하며 갑자기 사부님 법 속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박대(博大)한 함의를 느꼈습니다. 마치 제호관정(醍醐灌頂) 하듯 법 속에 녹아들어 시간은 정지하고 심신이 편안하며 말할 수 없는 감격에 눈물이 얼굴을 적셨습니다….

4. 생사를 건 대결, 마굴을 뛰쳐나오다

수련은 너무나 엄숙합니다. 자주 법공부를 마음에 담지 못하고 주동적으로 안으로 찾지 않고 피동적으로 마음을 닦았으며, 너무 많은 집착심을 여전히 깨끗이 버리지 못하고 일하는 것을 수련으로 여기는 등 여러 원인으로 인해, 구세력이 제게 음험하게 안배한 수련 길에서 가장 큰 죽음의 관(關)이 조용히 찾아왔습니다.

한번은 수련생을 찾아가는 도중 버스 옆자리의 남자에게 장쩌민 고소 등 대법 진상을 알렸는데 뜻밖에 그가 사복 경찰이었고 차에는 소매치기 담당 경찰 다섯 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강제로 파출소 구치소와 지극히 사악한 법제교육센터(세뇌반)로 납치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일생 중 가장 괴롭고 힘들었으며 내심 여러 번 절망하고 붕괴에 직면했던 8개월여를 보냈는데, 명실상부한 암흑천지였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깊이 체득했습니다. “대법제자가 사악에 잔혹한 학대를 받는 원인은 바로 그들이 대법(大法)에 대한 바른 믿음을 견지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대법(大法) 중의 한 입자이기 때문이다.”[정진요지2-대법(大法)은 견고하여 파괴할 수 없다]

아마 음력 정월 말이었을 겁니다. 계속 단식하며 박해에 항의했기 때문에 저는 시체 침대[死人床]에 묶여 몸을 반만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사악한 전향을 담당한 것은 장(張) 씨 성을 가진 여자 경찰이었는데, 매일 제게 악당의 그 무슨 ‘1400사례’ 등 가소로운 거짓말을 반복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진위를 논쟁했지만 누구도 상대방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정말 악당의 세뇌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윗선에서 하는 말이 맞다거나 만에 하나 틀리더라도 단호히 집행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습니다.

화장실도 못 가게 했는데 수액을 맞을 때 소변이 많이 나와 참을 수 없어 반복해서 신청해야만 젊은 경찰이 받아주었고, 그러고는 추이(崔) 대장이 자기 아버지 소변도 받아본 적 없다며 제게 정신적 압력을 가했습니다. 참을 수 없을 때가 많아 두 겹의 이불 중 일주일도 안 돼 하나는 이미 흠뻑 젖었고 다른 하나도 일부 젖었습니다. 초봄 날씨가 매우 추운데 이불도 젖어 때로는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보름 만에 저는 견딜 수 없어 유동식을 먹겠다고 꾀를 내어 사인상에서 내려왔습니다.

처음에는 ‘하루라도 나가지 못하면 밥을 안 먹고 박해에 항의하겠다’고 생각했고, 속으로 두세 달 단식하면 나갈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3개월이 되어도 아무 희망이 없었습니다. 저는 내심 매우 막막했습니다. 매일 쇠의자에 묶여 콧줄로 주입당하는 것도 괴로웠지만, 더 큰 문제는 악질 경찰이 대소변으로 고의로 고문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변보는 시간을 5분만 주었고 감시하는 무장경찰에게 사정해서 기껏해야 10분 정도 주었는데, 대변이 염소 똥처럼 건조해 한 알 한 알 나왔습니다.

3개월이 지났습니다. 단식을 계속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는데, 드디어 어느 날 점심에 두(杜) 씨 성을 가진 경찰이 뜻밖에 제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수련인입니까?” 저는 깜짝 놀라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은 사부님께서 그의 입을 빌려 일깨우신 것이라 다시 끝까지 견지하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오후 일과 시작하자마자 대대장이 달려와 점심때 제 꿈을 꿨다고 했습니다. 제가 믿지 않자 그가 말했습니다. “네가 3층에서 ‘홱’하고 뛰어내리는 걸 봤어. 나도 덩달아 급히 뛰어내려 너를 쫓았고.” 저는 제가 단식하려는 일념(一念)이 결코 간단치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밥을 먹이려고 그들은 회유와 강압을 병행하며 온갖 방법을 다 썼습니다. 몸이 아주 말라 팔의 가장 굵은 곳이 다른 손 엄지와 중지로 완전히 감길 정도였고 종아리는 장기적인 부종으로 누르면 쑥 들어갔습니다. 장 씨 여경은 한번은 저를 설득하다 자기도 눈물을 흘리며 몸이 망가지면 아이는 누가 돌보냐는 등 간절히 말해 저는 당시 정말 감동했고, 지난 두 달여간 그녀가 얼마나 나쁜지 보지 못했다면 정말 응낙할 뻔했습니다. 하지만 이성은 단식을 멈춰선 안 된다고 알려주었고, 제가 그녀의 호의에 감사하면서도 동의하지 않자, 과연 그녀는 눈물도 마르기 전에 악독한 안색으로 바뀌었습니다!

나중에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저를 세뇌했는데, 그중 한 여자 대장은 대학교수를 사칭해 전향 공작을 했습니다. 그녀는 매일 계란을 하나 까고 좁쌀 죽 한 그릇을 제 베개 맡에 두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당신은 보름도 못 버틸걸.’ 과연 13일 만에 그녀는 본색을 드러내어 크게 화를 내며 구두로 제 부은 종아리를 걷어찼는데, 찰 때마다 상처가 나고 살갗이 벗겨져 피가 낭자하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며, 10여 년 뒤에야 상처 흔적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저를 독방에 가두고 군인 자세 쪼그려 앉기, 벌서기, 들어서 오래 걷게 하기, 체조, 술 주입, 식초 주입(식초 한 병을 들이부음), 쓴 차(苦丁茶) 강제 마시기, 매일 쇠의자에 묶기(반년 동안), 한밤중에 잠 안 재우고 전향 진행하기, 매일 대소변 참게 하기, 구타와 욕설, 주먹으로 어깨 마구 때리기, 집단 구타, 찬물 붓기(총 두 번, 한 번은 큰 콜라병으로 20여 병, 또 한 번은 옷을 다 벗기고 쓰레기봉투를 씌운 뒤 물 반 통을 먹여 오줌이 발목까지 잠김), 팔에 바늘 찌르기(양팔 가득), 의자에 앉아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고 자기(꼬박 두 달) 등 20여 가지 육체적 고문을 가했습니다.

이 외에도 언어폭력은 더욱 다반사였습니다. “넌 나이가 서른 넘어서 맨날 바지에 오줌이나 싸고”, “불효자식”,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군”, “광신도”, ‘당을 반대하고 애국하지 않는다’, “이 개XX”, “어린XX” 등등.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그들이 대법과 사존을 욕하는 것을 자주 듣는 것이었고, 대법을 비방하는 문장과 영상, 전향자의 소위 참회록을 억지로 보고 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악당의 허위 업적을 선전하는 영상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들이 판사로 위장해 개정하고는 저를 중형에 처하겠다고 했습니다. 총 20여 명의 경찰(그중 소위 4대 전향 고수 포함)과 이미 타협하거나 심지어 사오(邪悟)한 수련생 여럿이 번갈아 가며 전향 공작을 해, 제 정신은 자주 고도의 긴장과 불안 상태에 빠져 사는 게 죽는 것만 못했고, 수차례 절망에 빠져 꿈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등 친척과 무덤을 여러 번 보았으며, 여러 번 벽에 머리를 박아 확 죽어버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위 벽이 모두 푹신하게 처리되어 있고 감시 경찰과 무장경찰이 24시간 감시하여 어떠한 기회도 없었습니다. 저는 평생 처음으로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 하루가 3년처럼 길다)’라는 성어가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반년 후 악질 경찰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제 단식 의지를 꺾기로 결정하고, 세숫대야만 한 큰 그릇에 끈적한 죽과 큰 옥수수 빵 네 개를 준비했는데 5~6명이 먹을 만한 양이었습니다. 의사가 문밖에서 대기하며 사람이 어떤 위험에 빠지더라도 죽도록 주입해 굴복할 때까지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이 생겨 할 수 없이 포기했습니다.

모든 고문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꼬박 18일 동안 잠을 못 자게 한 것인데, 이때 하마터면 미칠 뻔했습니다! 쉬(徐) 대장은 “네가 단식하고 물도 안 마시니 잠도 끊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경찰 네 명이 6시간씩 교대로 감시했는데 며칠 뒤 제가 너무 졸리자 경찰도 어떤 이는 책을 가져와 봤습니다. 1초라도 저를 안 보면 바로 눈이 감기는데, 그들 기분이 좋을 때는 쿡 찔러 깨우며 “자지 마, 자지 마, 누가 자라고 했어?”라고 하거나 잡담을 나눴습니다. 기분이 안 좋으면 때리거나 발로 차서 깨웠습니다. 때로는 두 사람이 저를 잡아 벽에 기대게 하고, 잠들면 생수병의 찬물을 끼얹어 깨웠습니다.

이렇게 보름 정도 되자 저는 정신이 몽롱해지고 온갖 환각이 나타나 사람을 잘못 보고 헛소리를 하며, 땅바닥 틈이 겹쳐 보이고 바닥이 벽처럼 서 있는 것 같고, 위의 콜라병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생각해도 왜 이 병이 가로로 있는데 떨어지지 않는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악질 경찰은 여전히 잠을 못 자게 했습니다! 제가 갑자기 인사불성이 되어 기절했다가 눈을 떠보니 의사의 흰 가운이 보였습니다. 의사가 좀 재우라고 해서 겨우 침대에 누워 한숨 잤습니다. 깬 후에는 의자에 앉아 매일 4시간씩 잤고, 단식으로 부은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 부기를 뺀다고 했는데 이것이 또 꼬박 두 달 지속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사악이 너무 많았습니다. 한번은 악질 경찰 쉬 대장이 전향 공작을 하는데 우리 둘이 바닥에 나란히 앉아 그가 끊임없이 악당이 보도한 거짓말을 말했고, 저는 가끔 건성으로 대꾸하며 속으로 끊임없이 발정념하여 악을 제거했습니다. 갑자기 그가 안색이 변하더니(악령이 몸에 붙음) 목소리 톤도 바뀌어 악독하게 말했습니다. “네가 날 제거한다고? 네가 날 제거한다고? 마(魔)도 생명이야!” 발로 제 등 뒤를 맹렬히 걷어차는 바람에 불시에 저는 바닥에 꼬꾸라졌습니다. 그가 제정신이 돌아오자 목소리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그래? 괜찮아?” 급히 저를 부축해 살펴보는데 저는 오랫동안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내가 발정념을 할 때 속으로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다른 공간의 마귀가 왜 이렇게 날뛰는 거지?’

베이징에서 이 장장 9개월에 가까운(7일 모자란 9개월) 시간 동안, 산과 하늘 같은 높은 압력을 견디기 위해 저는 수련 중에 깨달은 모든 법리, 인간세상에서 쌓은 모든 지혜, 모든 용기와 인내를 극한까지 발휘했습니다. 저는 끊임없이 마음속에 기억한 대법을 외웠습니다! 끊임없이 발정념하여 다른 공간의 사악한 요소를 제거했습니다. (나중에야 밖의 수련생들이 계속 저를 위해 발정념하여 악을 제거해 주었음을 알았습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는 모든 경찰에게 매우 깍듯하게 대하고 끊임없이 좋은 말을 하여 압력을 줄였고, 결국 악질 경찰이 반드시 ‘5서(五書, 다섯 가지 수련 포기 각서)’를 쓰라는 죄악의 요구를 버텨냈습니다. 하지만 몸과 정신은 갈수록 약해져 나중에는 특별히 악독한 경찰이 오면 무서워 떨었습니다(반은 진짜, 반은 가짜). 한번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강요에 의해 악당과 인민에게 죄를 인정한다는 말을 한마디 했고, 결국 단지 더는 파룬궁을 연마하지 않겠다는 데 동의하는 소위 보증서를 썼습니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저 자신은 이번에도 대법제자의 금강부동(金剛不動)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현지 경찰이 와서 저를 데려가 소위 3년 강제노동을 집행했습니다. 마침내 저를 미치게 하고 불구가 되게 하고 죽게 하고 사오하게 할 뻔했던 마굴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기쁨이 솟았습니다. 그날 길에는 눈이 펄펄 날렸는데 내리면서 녹아 길가에는 반 자 높이로 쌓여 있었고, 달력을 보니 입동이 아직 3일 남았었습니다.

한 고비를 넘지 못하면 다음 고비는 더 어렵겠지만 수련을 견지하려는 제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자비로운 사부님께서는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제고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노동수용소에서 6개월 후, 서서히 몸과 정신이 회복됨에 따라 저는 수련생과 협력해 단식으로 박해에 반대했고 적지 않은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수련생이 박해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 같이 끊임없이 “파룬따파하오”라고 외치며 항의했는데, 그날 밤 30분 동안 천둥이 쳤습니다. 이튿날 사부님 생신에는 맑은 하늘이 씻은 듯이 푸르렀습니다! 다들 전향대에서 뜻밖에도 ‘파룬따파하오’ 현수막을 든 홍콩 23조 반대 대행진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동영상 CD는 어떤 수련생이 대대장 집에 보낸 것인데 그가 보고 나서 플레이어에서 꺼내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제가 몰래 쓴 노동수용소 박해 상황 편지는 밖의 사람들이 순조롭게 받았고, 수련생 가족이 들여보낸 사부님 경문은 제가 순조롭게 다른 노동수용소로 가져갔는데 아무리 수색해도 나오지 않아 안의 수련생들이 돌려가며 보았습니다.

단식 두 달여 만에 저는 여동생과 아내에게 인계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아래 1년 4개월여(사악한 ‘법제교육센터’의 잔혹한 박해 8개월 포함) 만에 저는 마침내 마굴을 완전히 뛰쳐나왔고, 사악의 소위 강제노동 3년은 철저히 무너졌습니다! 이때 제 마음에는 잔인하고 무지한 경찰들에 대한 원망은 없었고, 오직 비할 데 없이 어렵게 대법에 대한 정신(正信)을 지켜내고 갇힌 새가 새장을 나와 자유를 되찾은 큰 기쁨뿐이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제가 대법제자가 되고 사존께서 친히 제도하시는 생명이 된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지요! 사부님의 보호가 없었다면, 대법 법리의 인도가 없었다면, 수련생의 정념의 가지(加持)가 없었다면, 제 몸이 10개라도 악당의 이토록 잔폭하고 파렴치한 유린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찌 조금의 신체 후유증과 마음의 상처도 없이 오늘까지 살 수 있었겠습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두 달간 밥을 못 먹은 저는 여동생이 사준 과자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습니다! 그전에도 그 후에도 이렇게 맛있는 맛은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 사부님께서 제게 주신 작은 상일 것입니다.

집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집에서 몇 년간 꽃을 피우지 않던 군자란이 꽃을 피웠습니다.

5. 전체가 협력하니 대법의 신의 위력이 드러나다

수련은 매우 엄숙합니다. 노동수용소 안에서는 법공부를 못 하고 연공을 못 해 매우 괴로워 나가면 반드시 법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연공을 많이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집에 돌아오니 생활의 압력, 집안의 속된 일, 자신이 인간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이 또 잇달아 닥쳐와 과시심, 색욕심, 안일심, 좋은 것을 추구하는 마음, 조급심, 쟁투심, 원망심 등이 다 일어났고, 의식해도 매우 더디게 제거되었습니다. 세 가지 일은 비록 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중사(中士)가 도(道)를 듣는’ 상태에 처해 있었고, 청소할 때 연속 3년이나 매번 공중에서 떨어지거나(세 번째는 손목을 심하게 삐었는데 심성 문제를 찾지 못해 1년 넘게 지나서야 완전히 나음), 전기 스쿠터를 타다 갈비뼈 6대가 부러지거나(대법의 위력에 의지해 약 한 알 안 먹고 30여 일 만에 나음), 납치와 소란을 여러 번 당하는 등 난을 초래했습니다. 한번은 시 공안국에서 전문적으로 공문을 내려 지역에서 저를 조사하게 해 하마터면 불법 판결을 받을 뻔했으니, 정말 사부님께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인상 깊은 몇 가지 일을 사부님과 수련생 여러분께 보고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수련생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비록 다들 어떤 심성 문제와 갖가지 부족함이 존재할지라도 걱정할 필요 없이, 모두 마음을 쓰고 주동적으로 협력하며 서로 일깨워주고 제때 법에서 자신을 바로잡으면 생각지 못한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지역의 네 수련생이 진상을 알리다 불법 기소되었는데, 이 사건은 공안부의 감찰을 받아 매우 엄중했고 노 수련생이 반복적으로 구금되어 적지 않은 사람의 마음에 잔혹한 박해의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젠싼장(建三江) 수련생 구출이 긍정적 영향이 컸지만 유감스럽게도 네 명의 수련생이 갇히게 되어 협조인의 압력이 매우 컸고, 자신도 도청당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다들 구출을 주장했지만 손발이 묶여 걸음을 떼지 못했습니다.

이때 사부님께서 정념이 강하고 대담하고 세심하며 박해받은 적이 없는 여자 수련생이 나타나도록 안배하셨습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수련생을 찾아 전력 구출을 주장했습니다. 제가 보니 이것은 사부님의 고심한 안배라 생각되어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변호사 선임, 가족이 공안국에 가서 석방 요구하기, 변호사가 세뇌반에 가서 석방을 요구할 때 발정념으로 협력하기, 친척과 친구 및 현지 대중의 서명을 받아 무조건 석방 요구하기 등 각종 일을 전개했습니다.

서명 활동의 효과는 아주 좋아 1차에 300여 명의 서명을 받았고 이후 속속 서명을 받아 1000여 명에 달했습니다. 두 변호사가 세뇌반에 가서 석방을 요구할 때 수십 미터 밖에서 50~60명이 그들에게 발정념을 해주어, 안의 10여 명 악질 경찰이 처음에는 매우 기고만장하고 무례했지만 1~2분도 안 돼 기가 꺾여 변호사에게 매우 깍듯하게 대했습니다.

어떤 수련생은 직접 재판장 집을 찾아가 진상을 알렸는데 그는 겁이 나서 문을 열지 못하고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소리쳤고, 어떤 수련생은 주관 국장 아내에게 진상 편지를 보내고 공소인 집 문손잡이에 진상 자료를 걸어두었습니다. 재판장 아내는 교장인데 친구에게 서랍 가득 진상 편지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사건 관련 수련생이 검찰원에 가서 검사에게 울면서 진상을 알리자 그녀도 눈물을 흘렸고, 휴지를 꺼내 수련생의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한 수련생은 남편이 박해받은 경험을 학교의 모든 교무실에 배포했는데 교장은 화내기는커녕 글을 잘 썼다고 칭찬했습니다. 많은 공검법(공안·검찰·법원) 인원이 해외 수련생이 건 진상 전화를 받았고 적지 않은 사람이 파룬궁 수련이 위법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 수련생이 방청 초대장을 배포하다 신고당해 사악이 두려워했고, 1차 재판 때 일부러 경찰과 특수경찰 300~400명을 동원해 주위 노점상을 전부 쫓아냈습니다. 하지만 다들 정념이 매우 강해, 어떤 수련생은 ‘파룬따파하오’가 인쇄된 조끼를 입고 현장에 왔고, 약 200여 명이 법원을 한 바퀴 둘러싸고 길가와 차 안에 앉아 조용히 발정념을 했으며, 경찰이 쫓아도 가지 않았고 사복 경찰이 차 번호판을 찍어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사악은 직장이 있는 수련생만 일부 불러가게 했습니다.

정사(正邪) 대전은 매우 치열해 전날 저녁에 부슬비가 내렸습니다(어떤 수련생 꿈에 법원 주위 길에 온통 작은 마들이 줄지어 가더랍니다). 법원을 경계로 하늘에서 법원 북쪽은 온통 흰 구름인데 남쪽은 맑게 개어 있었습니다. 이튿날 개정 전에 국보(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 담당 부국장은 변호사를 위협하며 변호사와 고함을 지르며 싸웠습니다. 법정에서 변호사는 파룬궁 수련이 무죄임을 격렬히 변론하고 공검법 인원이 사건 처리 과정에서 저지른 갖가지 위법 사실을 폭로하여 판사는 부득이 몇 차례 휴정했습니다. 결국 재판은 하루 종일 열려야 했고, 사건 관련 수련생은 법정에서 대법의 아름다운 진상과 수련 경험을 진술하여 유력하게 대법을 실증했습니다!

재판이 끝난 후 국보 경찰들이 수련생을 사진 찍어 박해하려 하자 수련생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휴대폰을 들어 그들을 찍었고, 15~16명의 경찰은 겁이 나서 급히 고개를 돌려 피했으니 정말 사(邪)는 정(正)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 기간에 심성을 제고하고 대법의 위력을 보여준 감동적인 사례도 적지 않았습니다. 어떤 수련생이 심혈을 기울여 국보 대대장이 최근 20년간 파룬궁 박해에 가담한 사실을 폭로하는 소책자를 썼는데, 많은 수련생이 잇달아 의견을 내며 어떤 일은 쓰지 말아야 한다, 이건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라 망치는 거라 했고, 어떤 이는 일부 사실이 부정확하고 오류가 있다고 했습니다(하지만 한 여자 수련생은 심성이 매우 좋아 묵묵히 보완했고, 주동적으로 당사자 가족을 찾아가 명확히 파악한 후 오류 부분을 수정하도록 도왔습니다). 어떤 수련생은 이 소책자 배포를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5, 6번 반복해서 수정한 뒤에도 또 수련생이 불만족스러워하며 의견을 내자 저자는 매우 짜증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제때 대법으로 자신을 바로잡고, 이것은 수련이며 사부님께서 자신의 제고를 안배하신 것임을 깨달았고, 수정 과정이 마치 보검을 가는 것과 같아 갈수록 예리해져 악을 제거하는 효과가 더 좋아질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다시 의견을 내도 짜증 내지 않고 기꺼이 수정하여 전후로 꼬박 20여 번을 고쳤습니다!

원래 이 대대장은 직권을 이용해 마을에 도로를 닦아주어 거짓 명성을 얻었는데, 결과적으로 그 마을과 주변 마을 주민들이 이 소책자를 보고 잇달아 의논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나쁜 놈이었구나!” 국보 대대장 본인도 이 소책자를 받아 보고 사건 관련 수련생의 매형을 찾아가 여기 많은 일은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말하다가 억울해서 눈물까지 흘렸고, 그 후로 그는 파룬궁 박해에 전혀 적극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재판은 꼬박 2년을 끌었고 사악의 판결 안배는 효과적으로 저지되어, 중형을 받을 뻔한 수련생의 형기가 낮은 수준으로 선고되었고(두 명은 5년, 한 명은 6년), 한 수련생은 집행유예(감외집행), 또 한 명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습니다. 사악은 실패를 달가워하지 않고 사후에 수련생 8명을 납치해 보복을 시도했습니다. 저는 공안국 지하실로 끌려갔는데 주위는 사우나실 같은 작은 방들이었고 안에는 형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게 뭐 하는 거지? 고문하려나?’ 하고 보니 마음이 약간 긴장될 뿐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녁에 우리 8명의 대법제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부 석방되었습니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의 훌륭한 협력은 대량의 사악을 해체했고 공검법 인원을 포함한 많은 세상 사람을 구했습니다. 그 후 몇 년간 지역은 매우 평온했고 큰 박해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장쩌민 고소가 350명 이상에 달했을 때도 잘 나오지 않던 소수의 수련생만 소란을 당해 왜 고소했냐, 누가 쓰라고 했냐 등을 질문받았을 뿐입니다.

또 말하자면 끝이 없는 더 신기한 일도 있는데, 한번은 완벽한 협력으로 진상을 알린 장거가 많은 경찰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당사자 A 수련생도 무사하여 박해자의 안배를 성공적으로 해체했습니다. 게다가 국내외 수련생들이 재판장 등과 그 친척에게 진상을 알리자 그들은 차마 더는 나쁜 짓을 하지 못하고 1년을 선고해 대충 얼버무렸습니다. W 수련생은 이미 10개월을 구금되어 2개월만 있으면 만기라 감옥으로 보내 박해하지 않았습니다.

길고 긴 수련의 길, 대법제자 된 것에 후회는 없습니다. 제자는 사존을 생각할 때마다 때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납니다. 사존의 홍대한 자비와 언제나 함께하시는 보호가 없었다면, 업력이 깊고 수련할 줄 모르고 못난 제자가 어떻게 오늘까지 올 수 있었겠습니까? 제자가 비록 고생을 좀 했지만, 사존께서 제자를 대신해 감당하신 것에 비하면 무엇이겠습니까? 제자는 오직 앞으로 끊임없이 정진하고 세 가지 일을 잘하며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고 서약을 실현하며 인연 있는 사람을 구해야만 사부님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습니다.

이상 발언에 법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명혜망 제22회 중국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5년 11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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