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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겪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다

글/ 중국 허베이성 대법제자 구술, 수련생 정리

[명혜망] 어릴 적 꿈에서 저는 하늘에서 끝없이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었습니다. 대법을 얻고 나서야 제가 하늘에서 인간 세상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일에 대한 관점과 행동방식이 달랐습니다. 한번은 발목을 삐었을 때 너무 아파서 이렇게 생각했죠. ‘아프다고? 난 네가 아픈 걸 두려워하지 않아. 오히려 널 더 강하게 압박해볼 거야.’ 그래서 동생을 업고 걸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발에 더 부담이 갈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잠시 걸었더니 발이 오히려 아프지 않게 됐습니다.

저는 중국 북방 농촌에서 자라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 당시부터 항상 고민했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이 되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좋은 사람이 되는가?’ 많은 책을 읽으며 답을 찾으려 했고, 인생에 관한 철학적인 구절을 발견할 때마다 공책에 옮겨 적었습니다. 성실하게 타인을 대하고 신용을 근본으로 삼는 등의 내용이었죠.

1997년쯤 아내와 함께 톈진(天津)에 가서 병을 치료했습니다. 제 큰고모 댁이 톈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료 후, 큰고모 댁에서 며칠 머물렀습니다. 할 일 없이 TV를 보던 중 소파 등받이에 ‘파룬궁(法輪功)’이라는 책이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당시 저는 기공에 관심이 없었고 중의학이나 UFO 탐색에 흥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료함에 그냥 책을 훑어봤는데 책이 정말 훌륭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가르쳐주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찾아 헤매던 문제들의 답을 이 책에서 발견했습니다.

당시 큰고모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파룬궁이 이렇게 좋은지는 몰랐습니다. 큰고모도 “이 책이 특별히 좋으니 한번 읽어봐”라고 권하셨습니다. 저는 ‘파룬궁’ 책과 사부님의 공법 교육 비디오를 직장에 가져갔습니다. 당시에는 ‘전법륜(轉法輪)’이라는 책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저는 공법 동작을 모두 비디오를 보고 스스로 배웠습니다.

처음 공법을 연마할 때 직장의 빈 층에서 연습했습니다. 텅 빈 넓은 홀에 저 혼자 공법을 연마하고 있는데, 창문 밖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귀신들이 올라오는 것이 보이거나 느껴졌습니다. 무서웠지만 사부님께서 설법에서 이런 상황을 만났을 때 사부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셨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리훙쯔 사부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로는 그런 상황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대법을 공부한 후, 한번은 원신(元神)이 몸에서 나왔습니다. 원신이 나와 공중에서 잠시 회전하다가 다시 제 머리로 돌아왔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자주 제 몸을 청리해주셨습니다. 배변할 때 하얀 덩어리, 고름, 피가 나왔고, 때로는 며칠 동안 거의 먹지 않기도 했으며, 가끔 몸이 매우 불편했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생겨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진정한 수련생들의 몸을 청리하는 법리를 설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관리하시며 제 몸을 청리해주신다는 것을 알았고, 청리 후에는 온몸이 가벼워졌습니다.

겨울에 실외에서 공법을 연마하는 건 매우 추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실내에서 하려고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실내가 붐볐기에 저는 다른 이들을 배려해 밖에서 연마했습니다. 놀랍게도 제2장 공법인 파룬쫭파(法輪樁法)를 연마할 때, 사부님께서 특별한 광경을 보여주셨습니다. 제 두 팔 사이의 파룬(法輪)이 휙휙 돌아가는 것을 뚜렷하게 느꼈고 정말 좋았습니다!

1. 굳은 의지

1999년 7.20 중공의 대법 탄압 이후, 저는 수련을 포기하지 않고 연마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거부해 직장에서 감금됐습니다. 직원들이 교대로 감시했고 매일 24시간 내내 방이나 회의실에 갇혀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이 번갈아 가며 교육했고, 잠도 못 자게 하며 파룬궁을 비방하는 자료와 TV 프로그램을 보게 했습니다. 저는 “이것들은 모두 거짓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각급 지도자들, 친척들이 차례로 저를 전향시키려 했고 심지어 마을 간부까지 왔습니다. 그들은 이해관계를 명확히 하며 저에게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그 시간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고 마음의 압박이 컸지만, 결국 그들의 전향 시도는 실패했고 저는 이겨냈습니다.

감금 기간 중, 제가 가진 유일한 200위안마저 도둑맞았습니다. 아내가 떠날 때 남겨준 돈이었는데, 당시 직장에서는 이미 저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화장실에 가거나 잘 때 저를 감시하던 동료가 가져갔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돈은 옷 주머니에 있었고 제 옷은 벽에 걸려 있었으며, 그 층에는 저 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빈 층에 저만 감금됐고 화장실도 같은 층에 있었거든요. 이 일에 대해 떠들지 않았고 아내에게만 말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는 법리를 생각하며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200위안에 신경 쓸 여유도 없었습니다. 일이 너무 많고 심리적 압박이 커서 마음이 매우 괴로웠습니다.

어머니가 직장에 찾아와 저와 다투며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셨습니다. 당시 제 마음은 굳건했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설득할 수 없자 화가 나 심장병이 발작했고, 급히 약을 먹여 응급처치했습니다. 이것이 가족정을 이용해 제 수련의 마음을 흔들려는 시도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내도 직장에 와서 “파룬궁 연마를 포기하지 않아 공직에서 해고된다면 이혼하겠어요”라고 했지만 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처남과 장인도 직장에 와서 다투었고, 처남이 저를 때려 코피가 났지만 여전히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아 결국 공직에서 해고됐습니다. 이는 우리 마을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원래는 공직이 없다가 나중에 모두가 부러워하는 공직을 얻었는데, 이제 해고됐으니까요. 사람들은 저를 어떻게 볼까요?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별의별 말을 다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지나가면 뒤에서 수군거리고 속삭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대부분은 저를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 기간 저는 제 선택에 후회는 없었지만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마을 밖 3~4km 떨어진 곳에 고성(古城)이 있었는데, 저는 혼자 그곳에 가서 성벽을 따라 걸으며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 나는 이 대법을 위해 왔는데,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인간 세상에 온 이유가 무엇일까?’ 나중에 이 말을 아내에게도 했습니다.

돌아온 후 아버지는 저와 부자 관계를 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마음에 담지도 않았으며, 아버지를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장쩌민(江澤民)이 일으킨 탄압 때문이며, 중공의 역대 운동은 모두 대중이 대중을 공격하도록 선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삼촌이 와서 “옷을 챙기고 많이 입고 물건도 많이 가져가라. 내일 너를 감옥에 보낸다고 들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삼촌 말이 결정하는 건 아니에요’라고 생각했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삼촌이 말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때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일하다 길에 울퉁불퉁한 곳이 있으면 자발적으로 메웠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마음에 새겼으며, 모두 저를 공인된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안타까워했습니다.

2. 높은 담장을 날아 넘어 정념으로 강제노동을 부정하다

2010년, 저는 시 구치소로 납치됐습니다. 구치소 가기 전에 시립병원으로 끌려가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당시 저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의사가 “소리치면 다른 환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겠습니까”라고 해서 더 이상 외치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구치소에서는 단식으로 탄압에 항의했습니다. 7일간 단식했고 그들은 시립병원 의료진을 불러 저에게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했습니다. ‘호랑이 의자’(고문 도구)에 묶인 채 여러 죄수들에게 붙잡혀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당했습니다. 어느 날 감방문이 잠겨 있지 않고 그냥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이 기회에 탈출하려 했습니다. 감방을 나와 두 번째 문도 경비가 없어 통과했지만, 세 번째 문에는 경비가 있어 나갈 수 없었습니다. 경비는 “뭐하는 거야? 어떻게 나왔어?”라고 물었고 저는 “나가려고요”라고 답했습니다. 그가 “누가 나가라고 했어? 빨리 돌아가!”라고 소리치자 여러 직원이 나와 저를 다시 감방으로 데려갔습니다.

감방의 죄수들은 “이번엔 큰일 났군. 어떤 벌을 받을지 보자. 이제 좋은 날은 없을 거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그들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경찰도 저를 찾지 않았고, 이 일은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저와 다른 여성 수련생을 강제 노동수용소로 보내려 했습니다. 그 수련생은 제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차 안에서 우리는 경찰에게 진상을 알렸고, 저는 기회를 찾아 도망치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속으로 ‘반드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시내에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차가 시 외곽으로 나가자 소변을 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기다리라고 했지만 저는 두 번 더 요청했고, 꽤 달린 후에야 차를 세웠습니다. 길가 주유소에 화장실이 있었고 담장이 있었는데, 높지도, 낮지도 않아 제게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지형을 살펴본 후 마음속으로 준비했습니다. 두 경찰이 화장실 밖에서 지켰고, 수갑을 풀어주지도 않았습니다. 소변을 보고 나와 경찰 앞에서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특별히 가벼웠고 매우 빨랐습니다. 담장에 달려가 두 손으로 담장 위를 잡고 단번에 넘어갔습니다. 바깥은 땅이 파여 있어 담장이 2미터가 넘어 보였습니다. 저는 뒤돌아보지 않고 오직 달리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뒤에서 경찰이 “도망쳤다, 도망쳤다. 쫓아라, 쫓아라”고 소리치는 것만 들렸습니다. 멀리 달려가 수세미밭의 넝쿨 뒤에 숨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사부님, 그들이 저를 보지 못하게 도와주세요’라고 청했습니다. 한참 후 소리가 들리지 않아 밖을 보니 아무도 없어서 나왔습니다. 성공했습니다! 사부님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함께 차에 있던 여성 수련생 말로는, 실제로 그들은 저를 쫓지 않고 “쫓아라, 쫓아라”고 소리만 질렀다고 합니다. 그들은 마치 그 자리에 정지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대법의 위력이겠지요! 게다가 담장 높이로 보면 경찰도 넘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웃옷을 뒤집어 수갑을 가렸는데, 한 노인이 수갑을 봤지만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길가를 따라 돌아가며 걸었고 아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수갑을 보여주며 파룬궁을 수련해서 납치됐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파룬궁의 진상을 알리고 중공의 파룬궁 탄압이 잘못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그에게 중공 조직 탈퇴를 권유했고, 수갑을 풀어달라고 도움을 청했지만 그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지역 파출소에 친구가 있다며 도움을 주려 했지만,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해 결국 거절했습니다. 옥수수밭으로 가서 고압선 철탑의 모서리 쇠로 수갑을 풀려고 했습니다. 움직일수록 조여져 손이 아팠지만, 결국 수갑을 풀어 땅에 묻었습니다. 주머니의 돈으로 택시를 타고 시내로 가서 수련생을 찾았습니다. 수련생의 도움으로 여러 차례 이동한 끝에 멀리 다른 도시로 가서 유랑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제가 도망친 후 경찰이 집 주변을 막아 찾았고, 집에 와서 아내에게 제가 돌아왔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반년간 유랑 생활을 했는데, 안전상 집에 전화도, 소식도 전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기간 아내는 제 행방을 몰라 여러 차례 파출소와 공안국에 가서 “제 남편은 어디 있나요? 우리 남편은 어디로 갔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시간이 길어지자 ‘계속 이렇게 유랑할 수는 없지,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3. 강제노동 박해를 겪다

유랑 생활 반년 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개인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20여 명의 건장한 젊은이들이 왔습니다. 의아했습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왔지? 사장님이 무슨 일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그들이 저를 찾으러 왔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제 이름을 부르자 대답했고, 그들은 달려들어 저를 차에 납치해 바로 지급(地級)시(성급 아래에 있는 중간 규모의 도시나 지역) 노동수용소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에는 다른 현의 수련생들도 있었고, 다음 날 우리는 성(省) 노동수용소로 이송됐습니다.

그곳에서 10개월간 불법 구금됐습니다. 처음에 일을 하라고 했지만 거부했습니다. 바로 노동수용소 대장을 찾아가 “일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당신들이 저를 납치해 온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수련하는 사람은 마음이 바르면 사악도 감히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곳에서 죄수들에게 파룬궁의 진상을 알리고 많은 이에게 중공 조직 탈퇴를 권유했으며, 살인범도 포함됐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해두었다가 나온 후 인터넷으로 탈퇴시켜 주었습니다. 어느 날 노동수용소에서 ‘천안문 분신자살’ 조작 사건을 방영하며 보게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이미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렸는데, 또 이것을 보여주니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방영 후 경찰이 “할 말 있는 사람?”이라고 묻자 저는 “제가 할 말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일어나서 “예를 들어 저를 보세요. 아내가 둘째를 임신했을 때 여자아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아내는 낙태하려 했지만, 저는 ‘안 된다, 태아도 생명이야. 죽일 수 없어. 파룬궁은 살생하지 않아’라고 말했습니다. ‘천안문 분신자살’은 파룬궁이 한 게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경찰은 서둘러 “됐어, 더 말하지 마. 앉아”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나서서 말하는 것을 보고 다른 수련생들도 나서서 말했습니다. 그곳에는 법을 외우는 수련생이 있어 때때로 저에게 법을 외워주었는데, 그런 환경에서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건 매우 귀한 일이었습니다. 그 수련생에게 감사드립니다! 지급시 노동수용소에 처음 도착했을 때 경찰과 죄수들이 저를 때렸고, “공안이 사람을 때려요!”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성 노동수용소에서 함께 구금된 노인 수련생은 갈비뼈 세 개가 부러질 정도로 맞았습니다.

직장에서 공직을 해고당한 후 마을로 돌아왔을 때 첫번째 문제는 가족 부양이었습니다. 그 시절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버는 돈이 부족했습니다. 건설 현장에서 잡부로 일하고, 대형 차량을 운전하고, 일용직도 했습니다. 만난 사장들은 모두 까다로워 제 심성을 많이 시험했고, 버는 돈도 많지 않았습니다. 항상 돈 걱정을 했지요. 집이 샐 때 비가 내리듯, 한번은 집 밖에 놓은 농산물에 불이 나 수천 위안의 손실을 보았는데, 정말 아팠습니다. 이것이 다른 공간의 사악이 가하는 경제적 탄압이라고 깨달았습니다.

4. 공안국 사복 경찰에게 진상 알리기

한번은 버스에서 한 사람에게 진상을 알렸습니다. 그가 진상을 이해한 후 당 조직 탈퇴를 권유하자 생각해 보겠다며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압니까? 나는 공안국 소속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공안국이면 어떻습니까? 공안국 사람도 사람이지요. 사람이라면 진상을 알고 평안을 지켜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없었고 부정적인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탈퇴는 안 했지만,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면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수련의 길에서 비록 인간 세상의 많은 것을 잃었지만, 원망도 후회도 없습니다. 저는 파룬따파라는 고덕대법(高德大法)을 얻었고 사부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저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셨고 이제 제 인생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습니다. 저는 생명의 의미와 사람이 세상에 온 목적인 반본귀진(返本歸眞, 진정한 자신의 본원으로 돌아감)을 찾고, 사부님을 도와 법을 바로잡고 중생을 구하며, 우리의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깨달았습니다.

 

원문발표: 2025년 4월 2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4/21/4922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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