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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간 연속적으로 박해가 발생하는 지역에 대한 교류

글/ 료닝(辽宁)대법제자

〔밍후이왕〕근간, 우리 지역에서는 연속적으로 박해가 발생하고 있다. 이에 대한 나의 견해는, 수련인 사이에 너무나 많은 간격이 조성되어 정체로 강대한 정념 마당을 형성하지 못해 수련자로 하여금 고립 상태에 처하게 되어 사악의 박해가 쉽게 이루어 진 것이라고 생각 한다.

대법제자는 매 개인이 모두 정념의 마당이 있다. 만약 우리들 사이에 간극이 없고, 마음과 마음이 어울린다면 우리들의 정념 마당은 곧 일체로 연결되어 거대한 에너지마당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악이 우리 중의 그 어떤 대법제자를 박해하려고 해도 우리 정체가 형성한 거대한 정념마당을 돌파해야 한다. 만약 우리들이 일체로 응집된다면 사악이 우리 중 그 누구를 움직이려고 해도 어려울 것이나, 만약 우리 수련자가 상호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누가 옳지 않으면 누구에게 결함이 있다는 등 너무 많은 생각이 있다면 우리는 서로 분할되게 된다. 마치 젓가락과 같이 하나하나 분산 되어있거나, 혹은 세 개 다섯 개가 모였을 뿐, 백 개 천 개가 함께 모여진 상태가 아닐 때, 사악이 어느 수련생의 부족을 틀어쥐고 그 것을 약점으로 박해한다면 매우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나 개인이 인정하건대 이것이 우리 지역에 근간 2년여에 걸쳐 박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답은 우리 매 수련자들 자신에게 있다 고 본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먼저 수련하고 다른 수련자들의 부족함에 대하여 포용하고 자비로 대해야 하며, 서로의 부동한 인식과 방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편견을 갖게 되거나 그 누구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수련자 간에 교류할 때 좋지 않은 정서를 품지 말고, 마음대로 상대방의 부족 점을 담론하지 말며, 혹은 골목에서 주워들은 무슨 풍문을 말하여 더욱 큰 범위 내에서 간극과 틈새가 생기는 것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말 한 마디를 할 때나 어떤 작은 일을 할 때라도 모두 정체를 고려할 수 있어야 하고, 정체에 어떤 영향을 조성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상황은 같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한 중생을 구도하고 나면 한 생명이 구도된 것으로 하여 매우 기뻐한다, 그런데 수련자들 모두가 중생을 구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들이 모두 수련경지를 더해 응집한다면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정체를 이루어 수련생 모두를 보호하고, 함께 중생을 구도하는 더욱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각자 구도중생에서 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각자 개체별로 중생을 구도하면서 만약 각자의 언행이 정체를 쇠약하게 한다면 그래서 더욱 많은 중생이 구도 되는 것에 영향을 준다면 우리는 또 어떤 좋지 못한 작용을 일으킨 것으로 되는가? 우리는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았는가?

대법제자들이 모두 집착이 없이 누락됨이 없는 수련을 하는데 까지는 아직도 도달하지 못하였고, 또 매 수련자가 조그마한 착오를 범하지 않을 수도 없다. 모두들 이렇게 완벽할 수가 없는데, 우리 눈에 어느 수련생이 잘하지 못하고, 또 바르게 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다른 수련자역시 상대방을 보는 눈에도 역시 그러하지 않겠는가. 매 수련자마다 모두 잘 수련된 면이 있고 반면 역시 잘 수련 되지 못한 면이 있다. 아마 한 수련자가 이 방면에서 잘 수련되었다면 일부 수련자들은 다른 방면에서 잘 수련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서로가 잘 수련되지 못한 부분의 부족한 점을 보면서 서로가 편견을 갖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상대방의 부족함을 포용할 수 없단 말인가? 서로를 배제할 것을 희망하는가? 개인 수련 시기에는 이런 문제가 다만 개인 수련수준에서 제고해야 할 일이었으나, 지금의 정체수련 시기에서는 더 이상 개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포용이 한몫 더 있으면 정체의 용합이 한 몫 더 있게 되며, 우리의 마음에 배제하는 마음이 한 몫 더 있게 되면 정체에는 분열의 몫이 하나 더 있게 된다.

포용은 다른 수련자의 결점을 용인하고 다른 수련자의 수련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를 대하는 정확한 태도이다. 다른 수련자의 결점과 방법이 법에 부합 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만약 우리의 심태가 포용이라면 그 포용은 어떠한 것인가? 그를 마음에 용납하는 것으로 그와 내가 일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심으로부터 그로인해 조급해 하지 말고 진심으로 그를 도와 제고 되게 해야 한다. 이때 내 보내는 마음은 선한 것으로서 매우 자비하여 그를 협조해 주는 것이 매우 효과가 좋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 하셨다. “나는 늘 이야기 하였다. 만약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면서 티끌만치도 자신의 목적과 인식이 없다면 이야기한 말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끔 할 수 있다. 『정진요지』「깨여나라」그러나 만약 동수의 부족함 혹은 옳지 않게 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왜, 저러는가. 그녀는 왜, 저러는가.’ 하며 편치 않은 심사로 본다면 마음속으로부터 틈이 생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미 내심 깊은 곳에서 그를 밖으로 배제한 것이며, 그렇게 되면 심령심처에서 그는 반대편에 서있게 되는 것으로써 우리와 함께 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입으로는 어떻게 그를 협조한다고 말하여도 모두 자비의 힘이 없는 것으로, 교류 시 말투에 책망하거나, 원망하거나, 심지어 문죄하는 식으로 표현되어 나타나게 되고, 설렁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에는 간극이 있기에 우리들이 표면적으로 하는 말이 도리가 있다하더라도 그를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자비의 힘만이 생명의 심처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건대 한 번은 두 동수 사이에 모순이 나타나 내가 중간에서 조화롭게 조정을 시키려고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 누구에게도 편견이 없이 둘 사이의 모순으로 하여 정체에 영향을 주지 말아야 하며 진심으로 그들을 협조하여 좋은 중재안을 찾으면서 제고해야 하겠다는 심태로 양 쪽 모두에게 이야기를 하자 양자 모두가 접수했다. 그러나 후에 그 중의 한 사람에 대한 부면적인 소식을 많이 듣고 나서(사실은 진실이 아님) 곧 그에 대한 편견이 생기게 되었다. 비록 표면상에서는 표현 되지 않았지만 다시 그와 교류 할 때에는 하는 말에 자비의 힘이 없고 떠있다는 것을 나 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되자 어떤 도리가 있어도 그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만약 우리의 심태가 좋지 않고 듣는 쪽에서도 정확하게 대하지 못한다면 상호간에 더욱 큰 간극이 나타나게 되어 결국 더욱 더 전체의 정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포용의 다른 한 층의 함의는 우리는 다른 수련자가 착오를 범하는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하고, 그가 아직도 수련 되지 못한 집착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수련하여 원만하기 전에 어느 누가 착오를 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자신도 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수련자가 일찍 범한 착오를 틀어쥐고 놓지 않아서는 안 되며, 심지어 과거 오래전의 일을 늘 마음에 두고 잊지 않아서도 안 된다. 수련인은 부단한 제고 중에 있는 것으로 가능하게 그가 이미 수련하여 버렸을 수도 있는데 우리 자신의 마음속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니 이 어찌 될 말인가? 뿐만 아니라 만약 이러한 정서가 기타 수련자들에게 영향을 준다면 또 더욱 큰 범위 내의 간극을 조성할 수 있다.

아래에서는 우리자신이 다른 수련자의 부동한 의견, 심지어 비평, 질책을 마주할 때 어떻게 자신을 수련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 하려 한다. 만약 동료 수련자가 자신의 부족함을 보고 마음이 평온하여 화를 내지 않고 선의 적으로 지적 한다면 우리는 비교적 쉽게 접수하지만, 만약 그가 말하는 어투가 상화롭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거나 혹은 견해에 동의 되지 않고 사실보다 과장 되었다거나 인식이 부동하면, 흔히 마음속으로 아주 괴로워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이 집착을 찾고 수련하여 제고할 수 있는 기회이다. 나는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만약 자신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고 불편하고 억울하며,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 될 때면 곧 자신을 찾는다. “당신이 마음속으로 어떤 일 때문에 내키지 않아 할 때, 그것은 집착이 조성한 것이 아닌가?”『정진요지』「집착을 더 없애자」나는 반복적으로 이 어구의 경문을 암송하면서 자신의 어느 마음으로 하여 마음이 내키지 않는가를 빠짐없이 찾아서는 그것을 제거해 버린다. 변호하거나 해석하지 않고 자신을 수호하지 않고 자신을 내려놓는다. 왜냐하면 수호하는 것은 사람이고 자신을 내려놓는 것은 곧 사람을 내려놓는 것으로서, 이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것은 진정한 나이고 ‘神’ 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정서가 있을 때에는 수련생이 말한 것이 도대체 옳은가 그른가를 지나치게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집착이 이미 촉동되었기에 말한 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이 평정되었을 때 다시 동료 수련자가 한 말이 옳은가 그른가를 생각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차분할 때라야만 매우 이성적이고 매우 객관적인 법리로 동료 수련자가 내게 말한 것이 도리가 있는가를 가늠하게 되며, 만약 도리가 있다면 나는 승인하고 고친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생각 되면 그것을 내려놓는다, 하지만 그가 내게 한 것이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모두 나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고 정체에 책임지는 표현이므로 마음속에 감사함을 간직 한다. 물론 문제는 흔히 그렇게 간단하지 않으며 때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만 문제를 인식하는 각도가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문제를 보는 시각을 하나 더 많게 하여 설령 그의 인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가 문제를 보는 각도, 오직 그의 출발점은 법에 책임진다는 것을 보아내고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이 과정 중 그의 어떤 마음 혹은 어느 방면에 부족함이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되면 포용의 심태로 묵묵히 그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앞으로 기회를 찾아 그를 협조하여 제고하도록 한다. 그를 협조해 줌이 한 차례 교류를 통하여, 또는 다만 언어를 통하여 개변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감화를 받아 은연중에 변화의 영향이 작용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점을 정체에 두고 자아를 내려놓게 되면 곧 진심으로 매개 수련자를 위하게 된다. 한 번은 어는 수련자가 나를 찾아와 교류하면서 나의 부족한 점을 제기하였다. 만약 내가 정말로 그가 말한 대로의 상황이라면 그가 한 말이 옳으며 법에 부합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한 마디로 자신을 위해 변호하지 않았으며, 다만 수련생이 이렇게 문제를 보는 것으로 하여 기뻤다. 왜냐하면, 이전과 비교해 보면 그의 이 문제의 인식이 제고되었기 때문이다.

포용의 경지는 협조의 일을 하는 수련자로 놓고 말한다면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협조는 곧 수련자와 수련자를 연결시켜 일치하게 협조하여 일을 하는 것으로, 만약 자신의 마음속에 간격이 있다면 어찌 수련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겠는가. 어느 수련자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편견이 있고, 불만이 있든지를 막론하고, 또 어느 수련자가 자신의 인식과는 얼마나 다르든 지를 막론하고 모두 수용해야 하며, 내심으로부터 그 어떤 수련자에 대해서도 조그마한 간격도 없어야 하고, 동료 수련자 보다 낮다는 마음인 것이 아니라, 무아인 것이어야 한다. 일체를 포용하는 것은 자신을 수련하며, 자신을 내려놓는 과정이다. 수련인 사이는 크게 다르다고 해도 근본 상에서 우리는 사존의 제자이며, 함께 중생구도의 사명을 완성하고 있고, 법을 가장 크게 여기므로 어찌 개인의 정서가 정체에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 매 번 마음이 불편할 때면 나는 자신에게 말한다. 자아를 내려놓자! 그리고는 한 번 또 한 번 경문을 암송 한다. “당신이 마음속으로 어떤 일 때문에 내키지 않아 할 때 그것은 집착심이 조성한 것이 아닌가?”『정진요지』「집착을 더 없애자」자신을 수련하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의견이 있는 수련자를 마주 할 때에도 내심으로부터 ‘같은 수련자자이기 때문이라’는 친절감이 용솟음치게 된다.

수련자를 대함에 포용은 일종 경지이고 다른 한 방면은 그의 장점을 보아야 한다.

정체 협조로 말하면 매 수련자가 장점을 발휘해야만 비로소 개체 간에 상호 보충할 수 있다. 비록 매 개인은 모두 단점이 있을 수 있지만, 서로 간에 장단점을 상호 보충 한 후에야 비로소 정체가 누락이 없는 상태에 도달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동수들은 법리가 비교적 명확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각항 대법사업 중에 방법도 잘 제기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려 할 때면 늘 가정의 일 때문에 혹은 두려워하는 마음 등등의 원인으로 하여 참여하지 못 한다. 그러나 다른 한 부분의 수련자들은 착실하게 하는 정신이 있고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힘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두려워하는 마음도 매우 적지만, 법리에 대한 인식이 따라가지 못 하며 좋은 방법도 내놓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그들이 모두 장점만 보고 모두 장점만을 발휘한다면, 명확한 법리에 확실히 실시할 수 있는 방법에 착실하게 하는 정신을 가한다면 이 정체는 완비하지 않겠는가. 비록 개체는 모두 부족함이 있지만 상호간 장단점을 보충 한다면 정체는 완전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나 개인의 생각은 정체협조 중 응당 이러한 사유 방식이어야 하고 이러한 협조이어야 한다. 매 수련자가 어느 방면에서나 모두 누락이 없이 수련해야만 된다고 지나치게 요구하지 말아야하며, 매 사람마다 전능한 인재라야 한다고 지나치게 요구하지 말고, 협조 하는 중에 심성에서나 능력에서 반드시 각자의 장점을 보아 그로 하여금 그의 장점을 발휘하게 하여 서로 장단점을 보충해야 한다. 협조인은 더욱 이러한 사유방식이 있어야 한다. 만약 반대로 우리 모두가 각자의 단점만 본다면 곧 원망하고 비관하는 정서가 나타날 수 있어 그는 왜, 안 되지? 왜, 그는 무엇이든지 모두 안 되지! 등등 부정에 부정을 더하게 되어 정체의 힘을 쇠약하게 할 수 있다.

개인의 수련으로 말 하면 동료 수련자의 장점을 많이 보아야만 비로소 자신의 차이점을 찾을 수 있고, 제고가 더욱 빠를 수 있다. 어떤 수련자는 늘 자신의 단점으로 다른 수련자의 장점을 비기기에 거의 매 수련자로부터 모두 자신의 부족 점을 찾을 수 있고, 그들의 빛나는 면을 볼 수 있어,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에게서 더욱 많은 부족 점을 찾게 되어 급속히 부동한 방면에서 제고를 가져 올 수 있다.

“신: 이러한 문제는 이미 몹시 심각합니다. 그들은 상대방이 여하여하 하다고 본 것을, 반대로 자신을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정진요지』「시간과의 대화」

이 말씀으로부터 나는 우리들이 법리에 대조하면서 응당 자신의 언행과 사유를 가늠해야지 다른 사람의 언행을 가늠하지 말아야하며, 자신을 가늠하면서 안을 향해 찾아야 하는데 이는 사부님과 대법이 우리에 대한 요구이다. 다른 사람을 가늠하는 것은 밖을 향해 찾는 것으로서, 만약 일상적으로 이렇게 한다면 사유에 그가 어떠어떠하고 그녀가 어떠어떠하다는 등 동료 수련자에 대한 관념과 견해가 형성되는 것으로써 이는 속인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매우 많은 상황에서 우리들에게는 착오적인 사유 형식이 형성되어 늘 밖을 향해 보는 것이 습관으로 되었고, 눈에는 늘 어느 누가 어떠어떠하다는 것만 보이고, 다른 사람과 담론 중에서 때로는 동료 수련자의 진실한 상황을 오해하거나 잘못 전한다. 사실(事實)에 부합됨을 막론하고 조성되는 결과는 모두 한 수련자 혹은 몇 명의 수련자에 대한 편견이 수십, 수백 명 수련자 모두가 특정 수련자에 대해 편견을 갖게 한다. 이는 바로 마음속의 틈인바 정체로 놓고 보면 곧 간극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지역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개별적인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상적으로 한 수련자의 사건이 매우 짧은 시간 내에 매우 큰 범위 내에 널리 전해지는데, 어떤 수련자들은 그를 원망하고 나무라는 정서로 이야기 하며, 더욱 많은 수련자들은 속인의 일상사를 말하는 것과 같이 골목소식으로 마음대로 서로 담론하며 전한다, 동수들이여, 왜, 이런 행위가 정체에 나쁘게 조성되는 영향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못 한단 말인가? 이렇게 떠도는 말은 마치 여러 갈래로 탁류마냥 수련자들 사이에서 흐르는데, 흘러 이르는 곳마다 개천 둑이 갈라져 틈새가 생기듯이 정체는 깨져 여러 개의 작은 부분으로 분할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동수와 정체에 유익하겠는가? 내 생각에는 자기 생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직접 찾아 진심으로 그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열고 교류한다. 만약 그를 잘 알지 못 하면 그와 잘 아는 사람과 함께 찾아가서 법에서 교류한다. 진심으로 그를 협조한다는 자비심을 품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겠는가를 탐구한다. 그릇된 정서를 품고 도처로 다니면서 그에 대해 어떠어떠한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면, 설령 한 말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적합하지 않다. 이렇게 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좋은 점이 없고 반대로 더욱 많은 범위 내에서 수련자간의 간극을 형성하게 된다. 오늘, 우리 대법제자들은 박해를 부정하는 중에서 중생을 구도해야하는 사명을 완성해야하는데 매우 많게는 개인의 힘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의 상응에 의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언행이 정체를 약화시키게 해서는 안 된다!

수련자들이 연속 박해를 당하는 것을 보니, 나의 마음은 매우 무겁고 짓눌려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이다. 박해의 손실을 감소시키고 정체적으로 중생구도의 힘을 증강시켜야 하는데 이렇게 하려면 우리 매 수련자들은 모두 자신을 수련해 내고, 자비심을 수련해내고, 관용을 수련해 내며, 정체에 입각하여 문제를 고려하는 경지를 수련해 내야 한다.

문장완성 : 2011년 6월 1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6/1/就本地近期发生连续迫害与同修切磋-24174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