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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리훙쯔 사부님의 대만 방문 당시 에피소드 (하)

[명혜망](팡후이 기자) 리 선생님께서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일월담과 대만 각지를 둘러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마중 나온 수련자는 리 선생님께서 관광을 원하시는 것으로 여겼다. 이후에 알게 됐는데 그것은 대만에 대한 사부님의 관심이었다.

고궁박물관의 최고 해설원

1997년 11월 17일, 리훙쯔 선생님께서는 몇 명의 수련자들과 함께 대만 고궁박물관에 오셨다. 훙지훙(洪吉弘)은 사부님의 이번 방문이 헛되지 않게 하려고 급히 해설사를 신청했다. 그러나 해설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리 선생님께서는 몸소 수련자들을 이끌고 참관하기 시작하셨다.

'图1:李老师十一月十七日上午用过早餐后,即前往故宫博物院参观,结束后与前往参观的几位同行学员合照(博大出版社提供)。'
리 선생님께서 11월 17일 오전 조찬 후 고궁박물관을 참관하신 후 몇몇 수련자들과 사진을 찍으셨다.(박대출판사 제공)

모두 고궁박물관 3층에서 한 층씩 내려가면서 참관했는데, 리 선생님께서는 마치 집안 물건을 훤히 아시는 것처럼 수련자들에게 각 문물의 유래, 사용법, 당초 제작 과정 및 감상법 등을 해설해주셨다. 수련자들은 모두 아주 재미있게 들었다. 훙지훙은 리 선생님의 해설을 통해 모두 이런 고전 문물들을 어떻게 감상하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훙지훙은 또 그 당시 고궁 문물전문가들도 내력을 알지 못했던 황금색 뼈가 하나 있었다고 기억했다. 리 선생님께서 모두에게 그것은 용골(龍骨)이라고 알려주시면서 “수련자들에게 천목(天目)으로 그것의 미시적 입자를 보라고 가르쳐주셨는데, 바로 그 용의 형상이었습니다”라고 했다. 훙지훙은 ‘리 선생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천지간의 사물과 매 역사 문물의 내력을 꿰뚫어 보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녜수원(聶淑文)은 고궁박물관을 참관할 때 사부님께 “제가 수련 성취할 수 있을까요?”라고 여쭤봤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부님께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아주 엄하게 보시더니 “법을 얻었는데 어찌 수련 성취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다. 그녀는 사부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박물관 전체를 참관하시면서 고문물에 대해 무척 상세히 설명해주셨다고 말했다.

훙지훙이 이어서 말했다. “박물관을 참관한 후 원산 호텔에 가서 식사했습니다. 저는 계산대에서 먼저 결제하려 했지만 사부님께서는 제가 결제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후 사부님을 모시고 중정기념당(현재는 자유광장이라고 부름)에 갔습니다. 저는 사부님께 여기에서 우리가 연공장 하나를(음악홀 아래 주차장 옆) 설립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이곳은 나중에 사람들로 가득 차서 넘칠 것(연공하는 사람 수가 많아짐)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우리는 또 사부님을 모시고 국부기념관을 참관했습니다.”

다음날 훙지훙은 차를 운전해 아내와 대만에 온 한 수련자와 함께 리 선생님을 모시고 타이베이를 출발해 일월담으로 갔다. 훙지훙은 동부에서 가장 남쪽인 컨딩까지 간 다음 가오슝에서 일월담으로 가려고 계획했다. 리 선생님께서도 이 일정에 동의하셨다. 훙지훙은 이후에 말했는데, 리 선생님께서 재삼 일월담에 가고 싶다고 하셨으며, 그는 그때 리 선생님께서 대만에 오기 힘드신데 이번에 반드시 선생님을 잘 모시고 대만을 잘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图2:一九九四年十二月二十一日,李老师在广州体育馆讲法,这是在中国的最后一次开班讲法。'
1994년 12월 21일, 리 선생님께서는 광저우 체육관에서 설법하셨는데, 이것이 중국에서의 마지막 설법반이었다.

도중에 이란(宜蘭)을 경유했는데, 그들은 이미 이란으로 이주한 정원황(鄭文煌) 부부의 집으로 갔다. 그들이 정씨 집에 도착했을 때 리 선생님께서는 벽에 걸린 정원황, 허라이친(何來琴) 부부가 두 차례 리 선생님의 중국 지난 및 광저우 설법 학습반에 참가했을 때의 사진과 사부님과 수련자들의 단체 사진을 한 장씩 보시면서 “3년이 넘었네요!”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리 선생님은 부부와 한 시간 넘게 일상 이야기를 나누셨고 또한 그들 부부에게 대만에서 홍법한 정황을 물으셨다. 허라이친은 회상하며 말했다. 그 당시 홍법에 사용한 현수막은 모두 그녀의 딸이 수공으로 봉제하고 손으로 쓴 것인데, 그녀는 리 선생님께 이렇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 여쭤보았다. “사부님께서는 저에게 이렇게 계속하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허라이친이 보충해서 말했다. “리 선생님께서는 또 『미국에서의 설법』 녹화 테이프를 받았는지 물으셨는데, 리 선생님께서는 그때 법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지식인들이고 아주 높은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라 매우 깊게 말씀하셨다고 하시면서, 저희에게 들었는지 물으셨고 저는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리 선생님께서는 또 특별히 말씀하셨는데, 이후에 아주 많은 선생님이 허라이친에게 와서 공법을 배울 것이라고 하셨다. 허라이친은 마음속으로 의아했다. ‘나는 학력이 이렇게 낮고 아는 사람도 적은데 어찌하여 아주 많은 선생님들이 나를 찾아와 배우게 될까?’ 그러나 며칠 뒤 과연 많은 대학교수들이 그들을 찾아와 파룬궁을 배웠다.

마지막으로 리 선생님께서는 두 부부에게 이란의 수련자들을 모두 타이중으로 데려오라고 하시면서 타이중에서 또 한 차례 설법이 있다고 하셨다.

길에서 불법(佛法)의 자비와 위대함을 낱낱이 펼치시다

차를 몰고 이란에서 화롄으로 가는 쑤화공로 도중에 훙지훙은 휘발유가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연료계가 거의 바닥을 가리킬 때 큰 마을 하나가 보여 훙지훙은 급히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주유소를 볼 수 없었다. 그는 다급하게 마을 사람에게 물었다. “여기 주유소가 있습니까?” 마을 사람은 “여기는 주유소가 없습니다. 어떤 차든 이란에서 기름을 가득 채워야 화롄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듣고서 말씀하셨다. “석유회사는 어찌하여 주유소를 더 많이 설치하지 않았을까요?”

훙지훙이 자신의 소홀함을 괴로워하면서 산속에 갇힐까 봐 걱정하고 있을 때, 리 선생님께서 눈을 감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았다. 한참 뒤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의 계기판을 보았을 때 갑자기 바닥을 가리키던 계기판 바늘이 다시 기름을 가득 채운 위치로 올라가 있었다. 이에 그는 깜짝 놀라 아내에게 보라고 하니 아내도 보고서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그들은 순조롭게 화롄까지 운전해 갔다.

주차하고 식사하는 것을 모두 리 선생님께서 결제하셨다. 그날 밤 훙지훙은 자신이 재직하는 회사 산하의 중신 호텔에 투숙하려 했다. 훙지훙은 신용카드를 꺼내 결제하려 하면서 리 선생님을 말렸다. 그는 “리 선생님께서 갑자기 아주 높고 크게 변하시더니 손이 제 머리를 넘어서 계산대의 신용카드를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웃으시면서 ‘이것은 내가 보관합니다. 내일 다시 돌려줄게요’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다음날 리 선생님께서는 숙박비를 내신 후에야 훙지훙의 신용카드를 돌려주셨다.

다음날 조찬 때 훙지훙은 리 선생님을 위해 계란후라이 두 개를 가져왔는데 리 선생님께서 보시더니 “저는 생것을 먹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훙지훙은 날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호텔을 떠나면서 훙지훙은 마음속으로 리 선생님을 화남사(和南寺)로 모시려 했다. 이 절은 화롄 동쪽 해안에 있었는데 광(廣欽) 노스님이 이전에 이 절에 머물렀으며, 『서방극락세계유람기(西方極樂世界遊記)』라는 책을 썼다. 아울러 훙지훙의 친척도 이곳에서 승려로 있었기에 리 선생님을 이 절에 모셔서 참관하게 하고 싶었다. 그는 그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저는 그 길이 아주 익숙합니다. 어느 곳에 도착하면 거의 다 됐다는 것을 알죠. 그런데 매우 이상하게도 제가 마음속으로 거의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 이미 화남사를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훙지훙이 차를 멈추고 다시 돌아가려 하자 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앞으로 갑시다. 우리는 되돌아가는 길을 가지 않습니다.” 훙지훙이 계속 앞으로 가자 리 선생님께서는 훙지훙의 마음속 아쉬움을 아셨는지 “광흠은 이미 대법 중에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훙지훙은 말했다. “저는 줄곧 리 선생님께서 매우 급히 일월담에 가려 하시는 것을 몰랐고, 줄곧 리 선생님의 시간을 지체시켰습니다. 북회귀선에 도착해서도 저는 리 선생님께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자고 했고, 해변에 가서 리 선생님을 모시고 물놀이를 하려 했습니다. 해변에서 저는 한 줄의 파룬(法輪)들이 우리를 뒤쫓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안(東岸) 어떤 지점에 도착했을 때 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곳에서 몇 리 밖 바다 중간에 2년 후 새로운 섬 하나가 갑자기 솟아날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2년 후 921 대지진의 결과다. 1999년 9월 21일 오전 대만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는데, 921 대지진, 또는 지지(集集) 대지진이라고 하며, 진앙은 난터우현 지지진으로 일월담 서편 남쪽으로 9.2km 떨어진 곳이다. 대만 전 지역이 심한 요동을 느꼈고 총 102초간 지속됐으며, 대만 근 백년래 사상자 손실이 가장 참혹한 천재지변이었다.]

다음날 훙지훙은 매우 괴로워했다. ‘내 ‘지역’에서도 또 리 선생님께서 결제하시게 하다니!’ 타이둥에 거의 도착했을 때 그는 속으로 오늘 밤은 어떻게 해서라도 더는 리 선생님이 결제하시게 하면 안 되고, 리 선생님을 고급스러운 즈번라오예(知本老爺) 호텔로 모시고 가서 고급 만찬을 대접해 보상하려고 계산하고 있었다. 훙지훙이 이렇게 계산하고 있는데 이때 리 선생님의 말씀이 들렸다. “차를 세우세요!” 훙지훙은 듣고 차를 세웠지만 얼굴에는 의혹이 가득했다. “차를 세워서 뭘 하시려고요?” “식사합시다!” “그런데 여기는 식당이 없는데요.” 훙지훙은 주변을 둘러봤다.

리 선생님께서는 곧장 앞으로 걸어가셨고 모두 뒤를 따라서 한 집 문 앞에 이르렀다. 대문을 열어보니 원래 이곳은 뷔페식당이었다. 이 눈에 띄지 않는 간판도 없는 가정식 뷔페라 간단한 설비만 있었고 또 간단한 몇 가지 요리만 제공했다. 훙지훙이 말했다. “결국 여전히 리 선생님께서 돈을 내셨습니다.”

사실 리 선생님께서는 7일간의 대만 방문 기간 동안 항공료, 숙박비 등 여행비 지출을 일률적으로 자비로 부담하셨다. 접대를 책임진 녜수원의 말에 의하면 원래는 대만 수련자들이 리 선생님의 숙박비를 부담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선생님의 생활은 매우 간소하고 소박하셨습니다. 그러나 대만에 오시는 일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수련자들이 돈을 내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셨고, 수련자들에게 어떠한 번거로움과 부담도 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번 여정에서 깨달음이 있었던 훙지훙은 정중하게 리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리 선생님, 지금부터 저는 선생님을 ‘사부님’이라고 고쳐 부르겠습니다.”

일월담은 대만의 명맥

일행이 일월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리 선생님께서는 특별히 모두에게 당부하며 다음날 오전 7시 이전까지 자신을 깨우지 말라고 하셨다.

다음날 오전 식사를 마친 후 훙지훙은 리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선생님을 모시고 일월담의 문무묘를 참관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제의를 리 선생님께서 거절하셨다.

“그럼 제가 선생님을 모시고 샤오족(邵族) 문화촌에 갈까요? 그곳에는 원주민의 문화가 있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그럼 선생님을 모시고 호수를 한 바퀴 돌까요?…반 바퀴라도?” 훙지훙은 마음속으로 의혹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 맙시다. 우리 갑시다!” 리 선생님께서 대답하셨다.

훙지훙은 속으로 생각했다. ‘리 선생님께서는 매일 나에게 일월담에 가야 한다고 하셨는데, 일월담에 도착하니 이미 한밤중이 됐고, 호수조차 한 번도 보지 않으셨는데, 이렇게 천 리를 멀다하지 않고 이곳까지 달려왔는데 풍경을 감상하시려는 게 아니었나?’

아마도 훙지훙의 곤혹을 알았는지 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월담의 이 신(神)은 본래는 괜찮은 신이었는데, 과도한 개발이 그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 한마디 말씀은 훙지훙을 더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때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여러 해가 지난 후 훙지훙은 마음속에 있던 의혹을 다시 한번 리 선생님께 여쭤보았다. “사부님께서는 그때 대만에 오셨을 때 매일 일월담에 가야 한다고 하셨는데 결국 일월담에 간 후 보지도 않고 떠나셨습니다.” 훙지훙의 질문에 리 선생님께서는 일월담의 존망은 대만 전체의 생명사슬과 연결돼 있다고 대답하셨다.

이 명확하지 않은 대답에 대해 훙지훙은 이번에는 이해하게 됐다. 그는 자신이 그 여정에서 핀둥에서 컨딩, 가오슝, 자이까지 일월담에 이르기까지 관광지에 도착할 때마다 모두 선생님께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자고 청했던 것을 회상했다. 한번은 리 선생님께서 웃으시면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은 도대체 또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 하나요?” 그때 그는 리 선생님께서 일월담으로 급히 가려는 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그들이 일월담을 떠나기 전에 리 선생님께서는 훙지훙의 아내에게 쪽지 한 장을 주셨다. 쪽지 위에는 시 한 수가 적혀 있었고 이 시는 나중에 『홍음』 책에 수록됐다.

일월담(日月潭)을 거닐며

맑은 호수에
노을빛 아름답게 비껴드누나
몸은 난세 속에 있나니
홀로 아름답기 참으로 어렵도다

21일, 훙지훙은 리 선생님을 모시고 식물원, 역사박물관을 참관했고, 또 기차역 부근의 신광산웨 빌딩(그 당시 타이베이에서 가장 높은 랜드마크 건물)을 참관했다. 리 선생님께서는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와, 천상의 천녀가 꽃을 뿌리고 있네요”라고 말씀하셨다. 리 선생님께서는 또 우리에게 어떻게 보는지 가르쳐주시면서 이렇게 여기서부터 보라고 하셨다. 훙지훙은 “그런데 저는 금빛이 반짝이는 것, 백금 같은 것만 보였고 천녀가 꽃을 뿌리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공항에서 배웅할 때 다행히 다시 설법을 듣다

랴오샤오펑(廖曉鳳)에게는 인상이 아주 깊었던 또 다른 한 가지 사례가 있었다. “공항에서 배웅할 때 리 선생님께서는 2층 로비 대기실에서 약 1시간 설법하셨습니다. 비록 그 로비가 실내였지만 위는 유리였고, 저는 리 선생님께서 그곳에 앉아 설법하시는 그 시간 동안 햇빛이 아주 밝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햇빛이 쏟아져 내려 리 선생님 몸과 배웅 나온 수련자들 몸에 비쳤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항에서 사진을 찍은 후 리 선생님께서 출입국 관리소로 들어가실 때는 오후 시간이라 출입국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런데 리 선생님께서 들어가려고 하실 때 주변 인파가 갑자기 양옆으로 갈라서면서 통로 하나가 생기면서 사부님께서 걸어가시게 했습니다. 이 장면은 아주 특별했고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리 선생님께서도 고개를 돌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계속 모두에게 손을 저어서 작별 인사를 하셨고, 우리가 사부님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손을 저으셨습니다.”

랴오샤오펑은 전체적으로 말하면 그 당시 모두가 법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충분히 중시하지 않았고, 많은 수련자들이 여전히 가부좌를 얼마나 오래 할 수 있는지만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때 리 선생님께서는 중국의 매 보도원의 머리 위에는 모두 칼 한 자루가 걸려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의미는 바로 그들이 그 환경에서 압력이 아주 크다는 것이었다.

황춘메이(黃春梅)는 리 선생님께서 “지금의 하루는 과거의 1초입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했다.

천신린(陳馨琳)은 또 “사부님께서 대만 수련자들을 보고 매우 기뻐하시면서 ‘저는 또 올 겁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부님께서는 매우 친절하셨는데, 수련자들이 사부님을 매우 존경해서 감히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때 사부님께서는 긴 의자에 앉아 계시면서 계속 우리에게 와서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사부님과 빈자리 하나 떨어진 곳에 앉았지만, 사부님께서 계속 부르셔서 이후에 저는 사부님 곁에 앉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한 가지 천신린에게 인상 깊은 일이 있었다. “사부님께서 출입국 관리소로 들어가시다가 한동안 걸으신 후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손으로 녜 언니(녜수원)를 가리키시고 또 우리를 가리키셨습니다.” 천신린은 그때 마음속으로 그 의미를 알아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녜수원과의 갈등을 해소하라는 의미였다. 녜수원은 본토 사람이라 대만 수련자들이 그녀의 사유와 말하는 태도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만 수련자들 대다수가 신수련자라 법리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해 아주 많은 사람의 마음이 있었다. 사람마음의 부딪침 속에서 안으로 찾아야 하고 자신을 닦아야 하는 것을 그다지 잘 알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것 또한 하나의 수련 과정이었고 심성을 제고하고 자신을 승화하는 과정이었다.

훙지훙은 리 선생님께서 대만에 일주일 머무는 동안 운 좋게 사부님을 모시고 대만을 한 바퀴 돌면서 사부님께서 보여주신 많은 신통을 목격했다고 회상했다. 리 선생님께서 대만에 오실 때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떠나실 때도 수련자들에게 통지하지 않으셨다. 항상 수련자들을 방해할까 봐 배려하셨고, 곳곳에서 항상 타인을 위해 생각하는 일면을 보여주셨는데, 역시 가장 좋은 몸소 보여주신 가르침이었다.

 

원문발표: 2020년 4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나의 사부님
원문위치:
正體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20/4/25/40419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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