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감옥 고문 겪은 선량한 농촌 여성 셰바오펑, 억울하게 세상 떠나

[명혜망](랴오닝성 통신원) 랴오닝성 차오양(朝陽)시 파룬궁수련자 셰바오펑(謝寶鳳)은 선량한 농촌 여성이자 시어머니가 칭찬하는 좋은 며느리였다. 그녀는 진선인(眞善忍-진실·선량·인내) 신앙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1999년에 불법적으로 2년의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고, 2004년에 10년, 2016년에 또 5년의 억울한 형을 선고받아 총 17년간 감옥에 갇혔다.

장기간의 구금과 학대로 인해 감옥에 있던 셰바오펑은 췌장암에 걸렸으나, 감옥 측은 치료를 지연시켰고 한때 위독 통지서를 내리기도 했다. 2021년 형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에도 셰바오펑은 여전히 두 다리로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었다. 이때 그녀는 이미 박해로 가정이 파탄 나 홀로 살고 있었다. 2026년 2월 10일, 셰바오펑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65세였다.

谢宝凤

셰바오펑

셰바오펑은 차오양시 룽청(龍城)구 출신으로 랴오닝성 차오양시 치다오취안(七道泉)진 시싼자(西三家)촌에 살았다. 셰바오펑에게는 행복한 가정이 있었다. 남편과 금슬이 좋았고 귀여운 아들이 있었으며, 시어머니는 그녀를 친딸처럼 여겼다. 셰바오펑은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한 후 진선인을 굳게 지키며 집 안팎에서 좋은 사람,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중공)의 20여 년에 걸친 박해 속에서 셰바오펑은 자신의 신앙을 견지하다가 각각 2년, 10년, 그리고 또 5년의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며 가족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경찰이 자주 집에 와서 괴롭힘을 가해 집안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셰바오펑의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그리워하고 중공의 괴롭힘에 두려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은 장기간 아내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데다 아내가 박해받는 것에 대한 근심으로 뇌졸중을 앓았다. 그는 아내가 하루빨리 집에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2021년 셰바오펑이 마지막으로 출옥하던 바로 그날 불행히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제 17년간의 감옥 박해를 겪은 셰바오펑은 약 5년간 고독하게 살다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셰바오펑의 가정은 이렇게 중공의 박해로 산산조각이 났다. 다음은 셰바오펑이 중공에게 박해받은 사실 중 일부다.

불법적으로 2년의 강제노동 처분을 받다

1999년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셰바오펑은 납치돼 차오양시 스자허타오(十家河套) 구류소에 불법 감금됐다. 그곳에서 경찰은 그녀를 때리고 욕했다. 한 달여 후, 그녀는 다시 시다잉쯔(西大營子) 세뇌반으로 끌려갔다. 1999년 10월, 셰바오펑은 불법적으로 2년의 강제노동 처분을 받고 악명 높은 선양(瀋陽) 마산자(馬三家)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그곳은 인간 지옥이었다. 셰바오펑은 그곳에서 온갖 박해와 고문을 당했다. 밥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매를 맞고 욕을 들었으며, 하루에 10시간이 넘는 고된 노동을 했다. 잔혹한 박해는 셰바오펑의 굳센 의지를 꺾지 못했고, 파룬따파에 대한 반석같이 굳건한 그녀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셰바오펑의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 며느리 셰바오펑은 (불법적으로) 2년의 강제노동 처분을 받고 마산자로 보내졌습니다. …집에 남은 우리들의 삶은 더욱 힘들었습니다. 밭일할 사람도 없고, 아들과 손자에게 빨래와 밥을 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집안의 빨래, 밥하기, 밭일 등 농사일이 모두 칠순을 바라보는 늙은 제게 떨어져 온종일 허리와 다리가 아프도록 고생했습니다. …지금 그들이 우리 며느리를 어떻게 박해해 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불법 요원들에게 우리 며느리 셰바오펑을 즉시 석방할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셰바오펑은 노동수용소에서 2년 동안 고통을 견디며 가족과 2년 넘게 헤어지는 아픔을 충분히 겪은 후, 2001년 9월 마침내 집에 돌아와 가족과 재회했다.

떠돌이 신세가 되도록 강요받다

2002년 11월 중공 제16차 전국대표대회(16대) 기간에 중공 직원들은 또 셰바오펑을 찾아와 이른바 ‘보증서’(파룬따파 수련을 포기하겠다는 보증)를 쓰라고 요구했고, 쓰지 않으면 그녀를 세뇌반에 보내려 했다. 가족들은 셰바오펑이 다시 잡혀갈까 봐 걱정돼 그녀가 집을 떠나 잠시 박해를 피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도 말했다. “빨리 떠나시오! 그들이 또 사람을 잡아가려 하니, 당신이 잡히면 또 고생할 거요.”

셰바오펑이 집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촌서기 리수쉐(李樹學)가 경찰 무리를 데리고 그녀를 잡으러 왔다. 이렇게 셰바오펑은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밖을 떠돌게 됐다.

다시 10년의 억울한 중형을 선고받다

2004년 4월 3일, 차오양시 정법위원회 610사무실(중공이 불법적으로 설립한 파룬궁 박해기구)은 ‘전담반’을 구성해 차오양시 파룬궁수련자 10여 명을 납치했는데, 그중에는 떠돌이 생활을 하던 셰바오펑도 있었다.

당시 이 억울한 사건은 차오양시 국가안전국과 610이 직접 조종하고, 차오양시 공안국 국보(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 지대가 전담했다. 셰바오펑은 납치된 후 다시 스자허타오 구류소에 불법 감금됐다. 그녀는 단식하며 박해를 반대하다가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 주입을 당했고, 이후 고문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됐다.

가족이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의 동의도 없이 불법 요원들은 그녀를 링위안(凌源)시 노동개조 병원으로 보내 강제 수술을 진행했다. 이후 경찰은 그녀를 다시 구치소로 돌려보내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 주입 박해를 계속했다.

셰바오펑의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만나러 여러 차례 갔지만 매번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녀는 비통해하며 말했다. “(2004년) 4월 3일, 우리 며느리가 잡혀간 후 줄곧 스자허타오 구치소에 불법 감금돼 있었습니다. 최근에 또 박해를 받아 생명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너무 슬퍼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리 며느리 박해에 가담한 차오양시 공안국, 610, 그리고 국안(국가안전국)은 이미 단식한 지 여러 날이 된 바오펑을 링위안시 노동개조 병원으로 보내, 가족에게 서명하라고 알리지도 않은 채 수술을 했고, 수술 후 또 구치소로 돌려보내 계속 음식물을 강제로 주입하며 감금했습니다.”

“저는 우리 며느리의 생명이 매우 걱정되지만, 그들(중공 직원들)은 며느리의 소식을 철저히 봉쇄하고 죽어도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차오양시 내의 병원에서는 감히 하지 못하고 링위안시로 보낸 것입니다. 제가 며느리를 만나게 해달라고 여러 번 요구하러 갔지만 모두 못 만나게 했고, 너무 슬픈 나머지 저는 소리 내어 펑펑 울었습니다….”

이후 셰바오펑은 차오양시 솽타(雙塔)구 법원으로부터 불법적으로 10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랴오닝성 여자 감옥으로 끌려갔다. 2005년 3월 5일 명혜망 보도에 따르면, “선양 다베이(大北) 감옥에 불법 감금된 셰바오펑은 신앙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있다. 그녀는 하루에 10시간 이상 강제로 노동을 해야 했고, 몸이 매우 야위었으며, 안색이 좋지 않고, 부종도 있어 이미 병적인 상태다. 그런데도 지금 사악한 무리는 여전히 그녀에게 노동에 참여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 차가운 겨울에 그녀가 입고 있는 솜옷은 솜이 다 드러나 있고, 머리카락은 경찰에 의해 삭발당했다.”

중공이 박해 소식의 외부 유출을 봉쇄했기 때문에, 셰바오펑이 겪은 박해의 더 자세한 내용을 가족과 친구들은 알 수 없었다. 1년 후인 2006년 10월 19일, 명혜망 보도에 따르면 셰바오펑은 랴오닝 여자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 작은 방에 비밀리에 갇혀 잔혹한 박해를 받았는데, 잠을 재우지 않고 밥을 배불리 주지 않았으며 장시간 쪼그리고 앉아 있게 강요했다. 또한 죄수 중 구타를 일삼는 흉악범을 사주해 셰바오펑 등 파룬궁수련자들에게 ‘전향(수련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것)’을 위협하게 했다. 셰바오펑은 흉악범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라디에이터에 부딪혔다. 그들은 파룬궁수련자들에게 매일 밤 야간 연장 근무로 노역을 하도록 강요했다.

2014년 4월 1일, 온갖 고문을 당한 셰바오펑이 출옥했다. 그녀는 가족을 만났을 때 단지 한마디만 했다. “그동안 고생 참 많이 했어요. 노역을 할 때 손톱이 닳아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손가락이 변형됐어요.” 그녀는 가족에게 변형된 손가락을 보여주었다.

또다시 5년의 억울한 형을 선고받다

셰바오펑은 출옥 후 가족과 단란하게 지낸 지 불과 2년여 만인 2016년 9월 30일, 차오양현 경찰에게 다시 납치됐다. 셰바오펑은 차오양시 차오양현 법원에 모함당했다.

2016년 9월 30일, 셰바오펑은 다른 파룬궁수련자와 함께 차오양현 얼스자쯔(二十家子) 장터에서 사람들에게 파룬궁이 좋다는 진상을 알리다가 얼스자쯔 파출소 직원에게 납치돼 차오양현 공안국 국보대대로 끌려갔다. 2016년 11월에 불법적으로 체포가 승인돼 줄곧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2017년 4월 27일, 셰바오펑은 불법 재판을 받았고 법정에서 이치에 맞고 근거 있는 자기변호를 했다. 셰바오펑은 말했다. “저는 파룬궁을 수련해 좋은 사람이 되어 심신의 혜택을 받았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사람마다 모두 좋은 사람이 되면 우리 사회가 조화로워지지 않겠습니까?!” 두 변호사는 그녀를 위해 무죄 변론을 했다. 변호사들은 말했다. “법정에서는 증거를 말하고 법률은 4가지 요소를 말합니다. 법정은 이러한 범죄 사실을 증명할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이 소책자 몇 권이 어떻게 법률의 실시를 파괴했단 말입니까?” 변호사는 또한 법정에서 공정한 사법 감정을 요구했다. 그중 한 변호사는 또 이렇게 질문했다. “왜 해외의 그렇게 많은 나라에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중국만 허용하지 않습니까?”

재판 현장에서 셰바오펑의 남편은 눈물이 글썽거렸다. 아내가 장장 10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겪고 부부가 다시 만난 지 채 3년도 되지 않아 또 강제로 헤어지게 됐기 때문이다. 수년간의 정신적 압박으로 인해 한창나이인 이 남성은 이미 걸음걸이가 비틀거리고 있었다.

결국 차오양현 법원 판사 지서우쥔(吉首軍)은 셰바오펑에게 불법적으로 5년형을 선고했다. 지서우쥔은 파룬궁수련자에게 억울한 판결을 내린 후 가족에게 호언장담했다. “설령 파룬궁이 나중에 명예 회복이 된다 해도, 300년 후면 내 뼛조각조차 다 썩어 없어졌을 텐데……” 이를 통해 이 판사와 검사는 마음속으로 파룬궁수련자가 억울하다는 것, 즉 억울한 사건이라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양심을 속이고 요행 심리를 품은 채 박해에 가담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2017년 12월 5일, 셰바오펑은 선양 여자 감옥으로 끌려갔다.

감옥에서 박해로 암에 걸려, 출옥 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다

2017년 11월부터 2018년 3월까지 억울한 옥살이 중이던 셰바오펑은 배가 아프고 위가 아픈 등의 증상이 자주 나타났으나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병세가 갈수록 심해졌다.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못했고 먹기만 하면 토했다. 한번은 강제노동 현장에서 셰바오펑에게 복통 증상이 발작하여 콩알만 한 땀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가 되어서야 감옥 병원으로 이송됐다.

셰바오펑은 인사불성이 됐고 다시 선양 739병원 중환자실로 이송됐다. 중환자실에서 그녀는 20여 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 병원은 가족에게 병위 통지서를 내렸다. 가족의 간절한 간청에 의사는 비로소 셰바오펑에게 수술을 해주었다. 20여 일 후, 셰바오펑은 마침내 사선에서 깨어났다. 당시 셰바오펑의 주치의와 다른 의사들은 매우 놀랐다. 셰바오펑의 병은 이미 고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당시 셰바오펑은 췌장암으로 확진 받았다). 이미 병위 통지서를 내리고 가족에게 책임을 넘긴 상태였다. 그러나 셰바오펑은 사선에서 돌아왔다.

셰바오펑이 의식을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료 조건이 열악한 여자 감옥 내부 병원으로 이송되면서 셰바오펑의 병세는 다시 악화돼 또다시 인사불성이 됐다. 셰바오펑은 랴오닝성 여자 감옥에서 두 번째로 응급처치를 받고 깨어났으나, 또다시 감옥 내부 병원으로 옮겨졌다. 셰바오펑은 몸이 매우 허약해 여전히 음식을 먹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옥 측은 셰바오펑에게 파룬따파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가족이 여러 차례 감옥에 석방을 요구했지만, 감옥 측은 셰바오펑이 ‘전향’(즉 파룬따파 신앙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석방을 거부했다. 4감구(監區) 감옥장 탕옌(湯燕)은 셰바오펑에게 ‘전향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하며 말했다. “서명하면 병보석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어.” 셰바오펑은 당시 이를 거절했다.

셰바오펑이 ‘전향’하지 않자 그들은 그녀를 병원에서 다시 끌고 왔다. 셰바오펑은 비록 생명의 위기에서는 벗어났지만 두 다리는 이미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어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했다. 행동팀 스푸룽(石芙蓉) 등은 자주 그녀에게 욕을 하고 트집을 잡으며 괴롭혔다. 매일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대장은 셰바오펑에게 다른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작은 목욕 의자에 앉아 있게 했고, 취침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침대에 누울 수 있게 했다. 일요일 휴식일에도 침대에 눕지 못하고 하루 종일 작은 의자에 앉아 있어야 했다(사실상 변형된 체벌이었다).

2021년 9월 29일 출옥할 때까지 셰바오펑의 몸은 줄곧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그 이전에 셰바오펑의 시어머니는 두려움 속에서 세상을 떠났고, 뇌졸중을 앓던 남편은 셰바오펑이 출옥하던 날 세상을 떠났다. 아들은 타지에 있어 셰바오펑 혼자 생활해야 했다. 몸이 허약하고 외롭고 의지할 데 없이 지속적인 돌봄과 치료를 받지 못했다. 2026년 2월 10일, 65세의 셰바오펑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셰바오펑, 평범하고 선량한 농촌 여성으로 그 누구도 해친 적이 없고 어떠한 위법한 일도 한 적이 없는 그녀가 사악한 중공의 박해로 가정이 파탄 나고 목숨을 잃고 말았다. 중공이 마음을 수련하고 선을 향하는 파룬궁수련자를 잔혹하게 박해한 지 이미 27년이 됐다. 경찰의 불법 체포와 가택수색, 검찰원과 법원의 죄증 날조와 부당한 법 적용을 통한 모함은 시비와 선악을 뒤바꿔놓았으며, 파룬궁수련자와 그들의 가정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민에게도 거대한 재난을 초래했다.

파룬궁수련자가 바른 믿음(正信)을 견지하고 진상을 알리는 것은 피해자로서 정의를 되찾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정의를 바로잡고 사회의 양심을 수호하는 것이다. 미래에 법제가 밝아질 때 파룬궁수련자 박해에 가담한 모든 자들은 미래 정의의 법정 심판과 평생의 책임 추궁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인간 세상의 응보는 단지 응보의 시작일 뿐이며, 진정한 응보는 그들의 죄악에 상응할 것이다.

 

원문발표: 2026년 3월 30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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