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협조와 배합

【명혜망 2009년 11월 19일】 이전에 나는 솔로 댄스를 즐겨 보았다. 그러나 신운(神韵) 공연을 보고 나서, 일치하게 조화가 잘 어울린 집단적 무용은 뜻밖에도 이토록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며 그 어떤 아름다운 비길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단체 연공에 대하여 “집단적으로 연공하는 마당의 에너지는 대단히 큰 것으로서 확실히 사람의 수련에 대해서는 좋은 점이 있는데 이 점은 긍정적이다.” (>)라고 이야기하셨다. 목전 정법노정 중에서 법을 실증하는 각종 항목에 대하여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가 하나의 정체(整體)로 되어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일치하게 협력한다면 법력(法力)이 대단히 클 수 있다.”(>)고 이야기하셨다. 그러면 동수지간에 어떻게 해야 비로소 배합을 잘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에 대하여 나는 줄곧 법에 맞추어 묵묵히 사색하고 실천했으며 오늘 나는 개인의 각도에서 교류하고자 하니 기타 동수들에게 일정한 참고가 되기 바란다.

1. 자아에 집착하는 위해(危解)

자아에 집착하면 각종 사람의 마음이 파생하여 나와 개인의 수련을 교란할 뿐만 아니라 또한 직접 정체배합과 협조를 교란하게 되는데 환경을 더욱 복잡하게 변하게 만든다. 자아에 집착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자아를 중심으로 하고 자아의 인식을 강조하고 늘 자신이 대법으로 문제를 가늠한다고 여기어 다른 사람이 질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그래도 자신은 다른 사람을 위하고 정체를 위하여 책임진다고 여긴다. 사실 우리들은 모두 자신의 대법에 대한 이해로 문제를 보고 동수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대법 자체는 우리들의 천박한 인식으로 포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인식에 집착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질투심

바로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인하여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고 생활 속에서 좋은 점과 장려는 모두 응당 자신에게 주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모종의 좋은 점, 혹은 모종의 인정과 장려를 받고 자신은 받지 못하게 되면 곧 은근히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알고 있는 어느 사람이 어떤 방면에서 실패하게 되면 도리어 그들을 비평하게 되며 조금의 자비의 감각도 없다. 늘 다른 사람의 착오만 보게 되고 좋은 점을 보지 못하며 안으로 찾지 않으므로 하여 자신의 착오를 인식하지 못한다.

과시심

과시심은 자아에 집착하는 표현이다. 이런 심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늘 자신의 방식대로 일을 하게 하고 다른 사람은 응당 자신의 방법에 동의해야 한다고 여기며 자신의 문제를 보는 방법이 “정확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과 의견이 같지 않은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다. 동수와의 관계에서 이 문제는 다른 사람과의 마찰을 초래하게 된다.

2. 선의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자

사실 대법제자로서 매개 사람은 모두 대법의 진귀함을 알며 법을 실증하는 항목을 잘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왕왕 매개 사람의 개체의 차이로 인해, 처해 있는 부동한 각도로 인해 늘 부동한 의견이 나타나며 자신과 의견이 다르고 특히는 완전히 다른 동수에 대하여 우리는 맹목적으로 상대방이 법에서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 무단적으로 상대방이 법을 파괴하려 한다고 말한다. 맹목적이고 비판식으로 결론을 내리면 왕왕 수련생을 상해할 수 있으며 역시 동수지간의 간격을 더 벌어지게 하고 법을 실증하는 항목의 정상적인 진행을 저애한다. 사실 사람과 사람지간의 소위 모순은 왕왕 모두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은 모두 오해로 인해 산생한 것이므로 우리는 선의적으로 가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늘 다른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한번 수련생이 CD를 구었는데, 다른 한 수련생이 이를 보고 매우 화를 내면서 “당신은 왜 수련생을 위해 생각하지 않는가? 당신은 수련인이 맞는가? 당신이 CD의 표지에 민감한 내용을 써놓았는데, 나가서 CD를 배포하는 동수들이 어떻게 배포하라고 하는 것인가? 당신은 왜 동수의 안전을 위하여 고려하지 않는가? 라고 말했다.” CD를 만든 수련생은 억울하여 자신은 바로 수련생을 위하여 CD의 종류가 많아 표지를 만들어 CD를 배포하는 수련생이 구별하기 편리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고 또한 시선을 끄는 표지는 또 속인을 흡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하였다. 사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동일한 사건에서 모두 부동한 각도에서 문제를 고려한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으며 어느 일방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수련생을 질책하면 불화를 심을 수 있으며 우리가 부동한 의견을 표현할 때 만약 선의적으로 제출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질책하는 어투로 말하여 시간이 쌓이면 조화하기 어려운 측면을 조성하게될 것이다.

각도를 바꾸어 문제를 보면 사람간의 대립되는 것과 불유쾌한 것을 떨쳐버릴 수 있다. 인터넷에 있는 한 문장에서, 사람들이 컵을 놓는 습관을 조사하고 통계했는데, 컵을 바로 놓는 것과 엎어 놓는 비율이 1:1이고, 또한 중요한 점은 그 이유가 같은 것인데, 그것은 비교적 위생적이라는 것이었다. 처음 이런 통계 수치를 보았을 때 매우 놀랐으며 세상의 절반 사람이 나와 방법이 다르지만, 그들은 서로 같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속인 중의 말처럼, 다른 길을 통할 뿐이지 같은 목적이므로 우리는 우리와 의견이 부동한 소리를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역시 우리가 동수의 차이점과 부족함을 볼때면, 속인처럼 원활한 교제 수완을 채용하여 남의 원망을 살까봐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배후에서 말하는 것은 수련생을 위하여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수련인은 “진(眞)”을 말하는데 대법제자 사이에 응당 진심을 가지고 교류해야 하며 우리는 선의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배워 겸손하고 성실하게 동수와 소통해야 한다.

 
문장발표 : 2009년 11월 19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11/19/21288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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