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헤이룽장성 통신원) 하얼빈시 후란(呼蘭)구 파룬궁수련자 위언샹(于恩祥)은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중공) 장쩌민(江澤民) 일당이 미친 듯이 파룬궁을 박해한 이후 여러 차례 납치, 구금, 부당한 강제노동(勞敎)을 당했다. 그는 고문과 괴롭힘을 당해 귀가 멀고 윗니가 강제로 벌려져 세 개만 남았으며 아내와 두 딸은 극심한 공포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다음은 위언샹이 자신이 박해받은 사실을 진술한 내용이다.
파룬따파 수련 후 심신 건강 회복과 화목한 가정
저는 1997년에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저는 심장병, 위장병 등을 앓고 있었으나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모두 나았습니다. 수련 전에는 몸에 병이 있어 집안의 주요 노동력(농촌)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가정 형편이 비교적 어려웠습니다. 수련 후에는 몸이 건강해져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게 됐고 가정 형편도 넉넉해졌으며 삼륜차도 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제가 좋은 날을 보내게 된 것을 부러워했고 온 가족이 화목하고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1999년 7월 20일 중공 장쩌민 일당이 광적으로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일으키면서 저희 가정도 화를 면치 못했습니다. 저 자신이 고문과 구금 박해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제 가족인 아내와 두 딸도 극심한 공포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7·20’ 당일 청원하러 갔다가 가로막히고 아내가 끌려가다
1999년 ‘7·20’ 박해 당일 저는 성 정부에 청원하러 갔는데 무장경찰이 청원하러 온 파룬궁수련자들을 모두 에워쌌습니다. 이후 절대다수의 파룬궁수련자는 경찰에 의해 현지 파출소로 이송됐고 구류소에 보내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중에 있지 않았고 집에 돌아온 후 아이가 엄마가 파출소에 끌려갔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당시 소재지인 펀더우(奮鬥) 파출소로 가서 사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당시 파출소장 취잔타오(曲占濤)는 제가 온 이유를 알고 제게 크게 화를 내며 한바탕 소리를 지르더니 마지막에 제 아내는 풀어주고 저를 후란 구치소로 보내 15일간 부당하게 구류했습니다.
2000년 초 주민센터와 구치소에 연이어 부당하게 갇히다
2000년 1월 저는 처음에 후란진 둥펑(東風) 주민센터로 납치돼 24시간 감시를 받았습니다. 주민센터 직원들은 번갈아 가며 ‘면담’을 이유로 제게 더 이상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라고 강요했습니다. 주민센터에 부당하게 며칠간 갇힌 후 저는 후란 구치소로 납치돼 27일간 부당하게 구금됐습니다. 막 구치소에 들어갔을 때 감방의 감방장인 한 수감자는 밖에서 삼륜차를 몰던 사회 건달이었습니다. 그는 제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고 팔을 크게 휘둘러 제 뺨을 때려 당시 제 고막을 천공시켰습니다. 집에 돌아와 오랫동안 연공을 하고 나서야 청력을 회복했습니다.
2000년 4월 베이징 청원 후 납치돼 구타와 훼손성 음식물 주입을 당하다
2000년 4월 저는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습니다. 청원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경찰 병력이 부족해지자 그들은 시정 잡배들을 고용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토비(土匪, 지방 도적떼)처럼 제 모든 주머니를 샅샅이 뒤져 수십 위안을 빼앗고 저를 베이징 주재 사무소로 보냈습니다. 현지 경찰이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 주재 사무소에서 저를 현지로 납치해 와 후란 구치소에 가뒀습니다.
당시 구치소에는 후란 바이치(白旗)툰의 우 씨 성을 가진 30세가량의 남자가 있었는데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저를 모욕하고 욕했습니다. 그는 저를 벽에 기대어 서게 한 후 날아 차기를 하고 명치를 향해 주먹을 날려 저를 자기 주먹과 발길질의 표적으로 삼아 제 몸에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저는 단식하며 박해를 반대했는데 후란 구치소의 감옥경찰 의사 왕젠신(王建新)에게 음식물을 주입당했습니다. 그는 동물 치료나 동물에게 약(음식)을 먹일 때 쓰는 개구기로 제 입을 벌렸습니다. 그것은 쇠로 되어 있었고 제 입안의 치아 전체가 벌려져 흔들리고 염증이 생겼으며 잇몸이 붓고 아파서 조금만 짜도 고름과 피가 났습니다. 박해로 인해 제 윗니는 세 개만 남았고 아랫니 몇 개도 모두 흔들렸습니다. 그때 저는 40일 넘게 부당하게 갇혀 있었습니다. 그 기간 경찰은 우리집에 와서 베이징에서 저를 납치해 온 차비를 달라고 요구했지만 제 아내에게 거절당했습니다. 몇 차례의 부당한 구금으로 저는 3천여 위안을 갈취당했습니다.
2002년 심야에 경찰이 담을 넘어 들어와 괴롭히다
2002년 5월 부당하게 갇혀 있던 한 수련자가 병원에서 탈출했기 때문에 어느 날 밤 8~9시경 후란 펀더우 파출소 소장 왕셴쥔(王顯軍)이 경찰 몇 명을 데리고 우리집에 왔습니다. 대문이 열리지 않자 그들은 대문 위로 담을 넘어 들어왔고 마당에서 크게 소리 지르며 창문을 열고 들어오려 하고 문을 강제로 열려고 했습니다. 한참을 소리치다가 적당한 도구를 찾지 못하자 그제야 포기하고 다시 대문으로 담을 넘어 나갔습니다.
2003년 다시 납치돼 삼륜차를 빼앗기고 3년의 부당한 강제노동을 당하다
2003년 4월의 어느 날 저는 한 수련자 집에 갔다가 허핑(和平)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됐고 페달 삼륜차를 빼앗겼는데 지금까지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파출소에서 경찰(이름 모름)은 제 뺨을 때렸고 저는 쇠의자에 앉혀졌습니다. 저를 구치소로 보내 70여 일간 부당하게 가둔 후 저는 3년간 부당하게 강제노동을 당하게 됐습니다. 저를 노동수용소로 보내는 날 저는 차에 타지 않고 “파룬따파는 좋습니다(法輪大法好)”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제게 수갑을 채워 완자(萬家) 노동수용소 집중훈련팀으로 보냈는데 신체검사에서 혈압이 높아 불합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마침내 후란 구치소 인솔 감옥경찰 리밍주(李明久)가 무슨 연줄을 통해서인지 저를 들여보냈습니다.
완자 집중훈련팀과 창린쯔 노동수용소의 체계적 고문
완자 집중훈련팀에서 15일간 박해당한 후 또다시 저를 창린쯔(長林子) 노동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창린쯔 노동수용소 5팀 대장 자오솽(趙爽)의 사주를 받은 수감자 여러 명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고 4서(四書, 네 가지 수련 포기 각서)를 쓰라고 강요당했으며 쓰지 않으면 4서를 쓸 때까지 구타를 당했습니다. 노동수용소에서는 하루에 화장실을 2~3번밖에 갈 수 없고 물을 마실 수 없으며 배불리 먹을 수 없었고 단체로 화장실을 가야 했으며 조금이라도 늦으면 화장실을 감시하는 수감자 쉬쿤레이(徐昆雷)에게 구타와 욕설을 당했습니다. 수련자들끼리 말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고 물건을 주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제가 수련자에게 짠 채소를 조금 주었다가 부대장 창성궈(强勝國)에게 발각돼 제 짠 채소마저 버려졌습니다. 일할 때 수감자 중춘룽(仲春龍, 작업 관리자)은 제 입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저를 욕하고 꾸짖었습니다.
노동수용소에서는 아침 6시경부터 저녁 8~9시까지 일했는데 그들이 정한 양을 채우지 못하면 며칠 밤낮으로 잠을 재우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옥수수 가루로 만든 빵을 먹고 배추국과 늙은 가지국을 마셨는데 기름기라고는 전혀 없었으며 그릇 위에는 국물이 있고 바닥에는 검은 진흙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국 위에 뜬기름을 약간 띄워주고 검은 밀가루 찐빵을 주었는데, 먹는 짠 채소 안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올 정도였습니다. 집에서 넣어준 200위안을 수감자 우두머리 왕정궈(王正國)가 100위안을 요구했고 주지 않으면 트집을 잡아 때렸습니다. 집에서 보낸 물건도 온전히 받지 못하고 수감자 우두머리에게 압수당했습니다. 집에서 보낸 면도기는 조장 리샤오둥(李曉東)이 압수해 자신이 사용했습니다.
위에서 감사를 오면 모두 미리 계획을 짜놓고 수감자들을 가게 했기 때문에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 모릅니다. 파룬궁수련자들에게는 말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대법 비방을 거부해 전기봉 충격과 집단 구타를 당하다
2004년 봄 어느 날, 저녁 노동수용소에서 파룬궁수련자(30여 명)들에게 답안지를 작성하게 했는데 대법을 비방하고 사부님을 비방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막 노동수용소에 왔을 때 견디지 못하고 삿된 책을 베껴 쓴 치욕을 씻고자 답하지 않았습니다. 창성궈가 저를 끌어내 전기봉으로 전기 충격을 가했고 전기봉의 전기가 다 떨어지자 20대 젊은 감옥경찰이 제 뺨을 20여 대 때렸습니다. 또 수감자 폭력배 두 명을 불러들여 저는 구타를 당해 잠잘 때 몸을 뒤척이지 못하고 일어나기도 힘들었지만 다행히 수련자들이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저를 돕고 보살펴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와 다른 수련자 몇 명(전향이 잘 됐다고 생각하는 수련자들)을 1팀으로 옮겼습니다.
경문을 보다가 발각돼 전기 충격과 강제 채혈을 당하다
1팀에 있을 때 한 번은 제가 사부님의 경문을 보다가 지도원 양위(楊宇)에게 발각돼 전기봉 충격을 당했습니다. 저는 즉시 “경찰이 사람을 때린다!”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이후 한 감옥경찰이 들어와 몇 마디 하자 그제야 그는 손을 멈췄습니다.
1팀에서 어느 날 그들은 저와 다른 수련자를 감방에 따로 가뒀는데 갑자기 감방 문이 열리더니 순식간에 10여 명이 들이닥쳤습니다. 10여 명의 경찰이 한꺼번에 덤벼들어 우리 둘을 누르고 강제로 채혈하려 했습니다. 저와 다른 수련자가 협조하지 않자 그들은 우리를 덮쳐 강제로 채혈했는데 우리는 각각 주사기 하나 분량의 피를 강제로 뽑혔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어디에 쓰려는지 모르겠습니다.
단식하며 박해를 반대하자 전기 충격, 걸레로 입 막기, 모욕을 당하다
2004년 10월 17일 노동수용소의 구금 박해에 저항하기 위해 저와 수련자들은 단식하며 박해를 반대했고 무조건적인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마지막에 저 혼자 남았을 때 당시 제 몸은 매우 허약해져 있었습니다. 경찰 양위는 수감자에게 저를 식당으로 끌고 가게 지시했고 제가 입고 있던 바지와 신발이 모두 닳아 해졌습니다. 제가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치자 수감자(별명 샤오런)가 걸레로 제 입을 막았습니다. 양위가 전기봉으로 제 입, 얼굴과 몸의 다른 부위를 전기로 지졌고 저는 ‘나에게는 소용없다’는 일념을 발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전기봉으로 제 머리를 찌르며 저를 놀리고 모욕했습니다.
노동수용소가 가족을 압박하고 ‘전향자’를 찾아와 포위 공격했으나 실패
이 기간 1대대 대장 양진탕(楊金堂)과 지도원 양위는 천 리 밖 멀리 계신 제 아버지를 불러 저를 설득하게 했습니다. 또 제 딸이 다니는 학교에 가서 딸을 찾았고 제 아내와 매형을 불러 저를 설득하게 했습니다. 대장 양진탕은 “당신 가족을 다 불러 모아”라고 말했습니다. 제 가족은 노동수용소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가족을 불러온 것이 성과가 없자 그는 또 하얼빈시에서 사오자(邪悟者)를 찾아왔습니다. 사오자가 무슨 말을 하든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에게 여지를 주지 않았으며 결국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떠났습니다. 양진탕은 화가 나서 제게 소리를 질렀지만 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는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습니다.
전체 수련자가 박해에 저항한 후 전면적인 엄격한 관리를 당하다
2004년 10월 26일 1대대에서 박해받던 파룬궁수련자 전원은 박해를 반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 대다수 수련자는 노동에 참가하지 않고 명찰을 달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1대대는 노동수용소의 요구에 따라 전면적인 엄격한 관리를 시작해 매일 우리를 작은 의자에 앉히고 면담을 했으며 이후에는 전기봉과 쇠의자를 사용해 강제로 우리를 박해했습니다. 박해에 주로 가담한 창린쯔 노동수용소 관계자는 1대대 대장 양진탕, 지도원 양위입니다. 2005년에는 전향하지 않은 우리를 1대대에서 다시 5팀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구타당해 양쪽 귀가 크게 손상되고 청력이 심각하게 떨어지다
한 번은 제 혈압을 측정했는데 혈압이 180까지 올라가고 부정맥이 있었지만 자오솽은 제게 노동을 강요했습니다. 요구에 미치지 못하자 억지로 약을 먹이려 했고 제가 먹지 않자 자오솽에게 뺨을 맞았습니다. 양쪽 귀를 맞아 2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정상적으로 말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제 귀가 먹어버렸습니다. 저는 그를 고발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식당에 밥 먹으러 갈 때만 기회가 있었는데 그 시간대에는 소장, 부소장, 과장 등이 당직을 섰습니다. 저는 부소장 류룬(劉侖)에게 사실대로 말했지만 그는 “조사해 봐야지, 네 말만 들을 순 없어”라고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아무도 저를 신경 쓰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저는 단식으로 항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저를 2팀으로 옮겼는데 자오솽은 제가 또 그를 고발할까 봐 두려워 체면을 세우려고 일부러 2팀까지 와서 제게 “네가 구운 빵 세 개와 꽈배기 두 개를 원하면 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내가 너희 사람들을 너보다 더 심하게 때렸다”라며 다른 파룬궁수련자들을 박해할 때 매우 심하게 때렸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2팀에 간 후 2팀 대장이 제게 무슨 요구 사항이 있냐고 물어서 저는 집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건 할 수 없지만 5팀에서 예전에 제게 기한을 연장한 34일은 없던 일로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저를 하얼빈시 제2병원으로 데리고 가 귀를 진찰받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단식하며 무조건적인 석방을 요구했을 때 노동수용소 병원에서 정체불명의 약물을 주입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머리와 심장이 불편하고 발과 다리에 힘이 빠졌으며 기한이 또 7일 연장됐습니다. 저는 2005년 말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정이 장기적인 정신적, 경제적 큰 타격을 입다
이 박해는 제 가정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과 상처를 주었습니다. 두 딸은 정신적 압박과 경제적 여건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반에서 성적이 모두 상위권이었음에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장기간 공포스러운 정신적 압박에 시달렸고 충격과 두려움으로 인해 머리가 신경성으로 무의식중에 흔들리는 증상이 생겼습니다.
원문발표: 2026년 4월 13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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