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오직 대법을 얻기 위해 왔다

글/ 허베이성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1997년에 대법을 얻은 대법제자입니다. 사부님의 보호와 수련생의 도움 속에서 오늘날까지 걸어왔습니다. 아래에 정법수련 과정에서 겪은 몇 가지 체득을 써내어 수련생들과 교류하려 합니다.

1. 고층 아파트에 자료를 배포하며 두려운 심리를 극복하다

과거에 저는 사람들에게 진상 자료를 배포할 때 주로 자전거 바구니에 넣거나 주민 아파트에 배포했는데, 대부분 5~6층짜리 건물이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 고층 아파트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저는 자주 ‘저 안에 사는 사람들은 대법 진상을 알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고, 그들에게 중점적으로 진상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싹텄습니다. 아래에 고층 아파트를 대상으로 자료를 배포한 체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자신이 고층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없어 꽤 낯설게 느꼈고 심리적으로 약간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떤 일을 단지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제로’와 같으며, 핵심은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게다가 저처럼 50대인 대법제자는 주변 수련생들 중에서 비교적 젊은 편에 속하므로, 저에게는 고층 건물에 사는 중생이 진상을 알 수 있게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 책임임을 인식하긴 했지만 막상 실행하려 할 때는 마음속에 여전히 무형의 압박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번 집을 나설 때마다 자료를 받쳐 들고 공경히 사부님 법상에 말씀드렸습니다. “제자가 ○○아파트 단지에 가서 그곳 중생에게 진상 자료를 배포하려 합니다. 목적은 그들이 대법 진상을 알고 구원받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사부님께서 가지(加持)해 주시고, 무사히 다녀올 수 있도록 보호해 주십시오. 사부님 감사합니다.”

저는 보통 중국판 ‘명혜주보’와 ‘당신의 평안을 기원합니다’를 각각 한 부씩 지퍼백에 넣었습니다. 매번 많이 챙기지 않고 일반적으로 20여 개만 가져갔는데, 한 번에 너무 많이 배포하다가 주의를 끌어 수거당해 자료에 손실을 초래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곳의 고층 아파트는 대개 26~27층이라 한 라인을 다 배포하려면 보통 세 번 가야 했습니다. 매번 며칠씩 간격을 두었고, 그 기간에는 다른 건물이나 다른 아파트 단지에 가서 배포했습니다.

자료를 배포하는 과정에서 저는 사부님께서 ‘전법륜(轉法輪)’에서 말씀하신 ‘당신의 집 문 앞까지 갖다 주었다’라는 구절이 자주 생각나, 마음속으로 중생에게 말했습니다. ‘꼭 보세요! 이것은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아파트 단지에는 CCTV가 꽤 많았는데 저 역시 그것들과 소통했습니다. ‘대법제자를 비추지 마라. 만약 어쩔 수 없이 비추어야 한다면 오직 ‘빛만 있고 영상(圖象)은 없게’(전법륜) 하라.’ 비 오는 날은 우산을 쓰고 아파트 단지를 드나들 수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배포하는 전체 과정에서 저는 사부님의 정법 구결을 묵념하며 그곳의 사악한 요소를 청리했습니다. 그리고 배포를 마친 후에도 정념으로 그곳의 사악한 요소를 청리하는 동시에, 진상이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한 사람이 열 사람에게, 열 사람이 백 사람에게 전하기를 발원했습니다.

2. 진상을 알리는 마음은 순수해야 하고 책임감은 강해야 한다

자료를 배포하는 것 외에도 저는 수련생과 함께 대면하여 진상을 알리러 가기도 했습니다. 60~70km 떨어진 깊은 산골에 어느 향진(鄕鎭)이 있었는데, 그곳 중생은 진상 자료를 얻을 기회가 적어 제 마음속에는 늘 그곳에 갈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해 설날이 지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현지에 사찰 장터가 열렸고 마침 봄철 농한기라 사찰 장터에 가거나 친척을 방문하는 사람이 많을 때여서 저는 그곳에 진상을 알리러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저 혼자 가는 것이라 아내(수련생)는 다소 안심하지 못하고, 나중에 다른 수련생과 동행해서 가라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가고자 하는 제 소원이 매우 강해 결국 혼자 출발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 수련생의 말은 어쩌면 제 마음이 확고한지 보려는 하나의 고비였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소책자와 ‘명혜주보’가 들어있는 자료 가방을 멨습니다. 아내가 저와 연락하기 편하도록 그날은 휴대폰을 챙겼습니다. 저는 장거리 대형 버스를 타고 먼저 현(縣) 도심에 도착한 후, 다시 소형 버스로 갈아탔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길 중간에서 심각한 교통 체증을 만났습니다. 거의 11시가 다 됐을 때 휴대폰이 울렸는데, 아내가 전화해 일이 다 끝났는지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전 관례대로라면 이 시간대에는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녀에게 아직 가는 길이며 도착하지도 않았고 차가 막힌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더욱 안심하지 못하며 말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봐요. 이거 우연이 아닐 수도 있어요. 당신을 못 가게 하는 거 아닐까요? 그냥 돌아와요.” 저는 말했습니다. “돌아가는 길도 막혀 있어서 지금은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요. 안심해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제 마음은 매우 안정되어 있었고 어떠한 부정적인 생각도 없었으며, 오직 일심으로 사람을 구하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사부님께서 어떤 배치를 하시는 것일지도 모르니, 틀림없이 좋은 배치일 것이다.’

아내가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이 뚫렸고 승객들은 모두 기뻐했습니다. 길이 막혀 시간이 지체됐기에 운전기사는 차를 아주 빠르게 몰아 산과 고개를 넘어 순식간에 사찰 장터가 열리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비록 낮 12시가 다 됐지만 사찰 장터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때 저는 경찰차 두 대가 앞뒤로 쌩쌩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제가 온 방향을 향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틀림없이 제자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이곳 중생이 순조롭게 진상을 들을 수 있도록 그들을 이곳에서 떠나게 하신 사부님의 배치라고 생각했습니다. 보아하니 이전의 교통 체증은 확실히 우연이 아니었으며, 사부님께서 저를 늦게 도착하게 하시고 경찰을 일찍 떠나게 하셔서 이 공백을 저에게 남겨주신 것이었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3. ‘집’에 대한 깨달음

2006년, 저는 아내와 결혼한 후 장인어른을 모시고 함께 살았습니다. 장인어른은 일상생활에서 보살핌이 필요했습니다. 장인어른의 집은 어느 낡은 아파트 단지의 1층에 있었는데, 45㎡로 작았지만 살기 편했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했습니다. 장인어른은 60세 때 갑자기 뇌출혈이 발병하여, 스스로 돌볼 수 있는 상태에서 반쯤 돌볼 수 있는 상태로, 다시 스스로 돌볼 수 없는 상태를 거치며 15년간 앓으시다가 2012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내의 두 언니는 장인어른이 살아계실 때부터 집 명의 이전을 서두르라고 재촉했으나 아내는 줄곧 미루다가,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후 상속 절차를 밟아 집은 아내 명의로 되었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그 집을 세놓았고, 면적이 좀 더 큰 집을 빌렸습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현재 우리에게는 5~6만 위안의 저축도 생겼습니다.

제 부모님은 연세가 많으신 80대 노인으로 시골에 살기를 원하셨으며, 대법 진상을 알고 몸이 건강해지는 혜택을 얻으셨습니다. 2년 전, 제 고향 마을의 토지에 대해 ‘확권(確權)’을 하게 됐습니다. 중공 악당은 정권을 세운 후 사유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아 국민은 토지에 대해 사용권만 가질 뿐 소유권은 없는데, 소위 ‘확권’이란 것도 단지 택지와 경작지를 포함한 사용권을 확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집에는 새 택지와 옛 택지 등 두 곳의 택지가 있었고 10무(畝, 1무는 약 200평)의 경작지가 있었습니다. 남동생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고 저보다 일찍 결혼했는데, 분가할 때 새집과 대부분의 경작지는 남동생에게 주어졌고, 낡은 집과 약간의 경작지는 저에게 귀속됐습니다. 재작년 마을 경작지를 ‘확권’할 때 부모님은 저더러 남동생과 상의하라고 하셨는데, 저는 자신이 도시 호적(戶口)이므로 저에게 속한 경작지를 모두 남동생 명의로 넘기기로 결정했습니다.

나중에 택지도 ‘확권’을 하게 됐는데, 저는 낡은 집이 제게 ‘확권’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남동생이 등록 절차를 밟을 때 낡은 집을 아버지 명의로 적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제가 택지에 대해 또 상속 절차를 밟아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남동생이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했다고 약간 원망했습니다. 원래 아주 간단한 일이었고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일이었는데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와 함께 학교에 진학해 시골을 떠난 몇몇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그들의 ‘확권’은 모두 한 번에 처리됐다면서 저더러 제2차 ‘확권’ 확인 때 얼른 고치라고 권했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기회라며 마을 간부도 제2차 확인 때 고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2차 ‘확권’ 당일, 아버지는 다리 통증으로 가시지 못했지만 어머니, 누나, 남동생, 여동생이 신분증을 가지고 모두 현장에 참석해 그 낡은 집이 제게 속하는 것에 동의한다고 밝혔습니다. 줄을 서 있을 때 제 앞에 있던 사람은 마을 간부의 남동생이었는데, 제가 그의 상황을 물어보니 저와 똑같이 첫 번째 등록 때는 아버지 명의로 적었으나 직원이 아주 순조롭게 고쳐주었다고 했습니다. 저도 당연히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안 됐고 직원은 무슨 말을 해도 처리해주지 않으며, 첫 번째 등록 때 적힌 사람이 누구든 그 사람 명의로 갈 뿐이라고 계속 강조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만두자. 이렇게 된 바에야 나도 노력했으니 순리에 따르자.’

도시로 돌아오는 길에 저는 이 일에 대해 깊이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줄곧 이 일을 바꾸려고 노력했는데 왜 성사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경제적 박해일까? 아니면 애초에 성사되지 말아야 할 일이었을까? 아니면 내게 집착이 생긴 것일까? 내가 대법 수련인으로서 법에 입각해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중에 저는 깨달았습니다. 전통문화에 따르면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가산은 모두 부모님 명의로 있어야 하며 자녀의 명의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속인 사회는 확실히 변이됐지만 우리 수련인은 따라서 변이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제 부모님이 아직 모두 건재하시니 당연히 그분들 명의로 기록되는 것이 맞으며, 만약 제 명의로 기록된다면 부모님의 재산을 빼앗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고대였다면 이러한 일은 크나큰 불효였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제 마음이 많이 풀렸습니다. 이어 저는 이 일이 혹시 지상에는 제 집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 깨달았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대법제자이며 내 집은 하늘에 있다. 그렇다, 내 집은 하늘에 있다!’ 여기까지 깨닫자 저는 웃음이 나왔고, 이 일에 대해 마음이 확 뚫린 기분이 들어 더는 남동생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됐어요? 잘 처리됐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우리 이번 기회에 둘 다 잘 수련합시다! 지상에는 우리집이 없어요.” 제가 겪은 일을 그녀에게 이야기해주자, 그녀도 별다른 말 없이 “그럼 그렇게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집은 정말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이상은 저의 작은 체득입니다.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허스(合十)

 

원문발표: 2026년 5월 3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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