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마리아인’을 통해 본 현실 속 선악의 선택

글/ 위인(魏仁)

[명혜망] 왜 어떤 이야기들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실 가치가 있었을까? ‘성경·신약’의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들려주신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자.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반쯤 죽도록 때린 뒤 버려두고 갔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반대편으로 지나갔다. 또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보고는 마찬가지로 반대편으로 지나갔다. 그러나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다가가 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뒤,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봐줬다. 다음 날, 은화 두 닢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돌봐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 반드시 갚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다친 유대인을 보았을 때, 아마 속으로 ‘만약 내가 가던 길을 멈추고 구조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마리아인이 다친 유대인을 보았을 때, 아마 속으로 ‘만약 내가 가던 길을 멈추고 구조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알다시피, 당시 예루살렘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유대인 중의 성직자이자 종교 엘리트였으나, 이 제사장은 고난당한 동포를 보고도 모른 척하며 지나쳐 버렸다. 이에 비해, 유대인들에게 이방인 잡종으로 여겨지던 그 사마리아인은 오히려 이전의 혐오를 따지지 않고 인내심을 갖고 구호했다. 이를 통해 선악과 시비에 대한 판단 능력은 종족과 신분에 달려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꼬리표’를 시비의 기준으로 삼지 말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신의 언행을 선택해야 함을 일깨워 준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이치는 현실적으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많은 경우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사실에 근거해 스스로 시비를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상급자의 말을 따르기 쉬우며 자신이 진리를 쥐고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그리고 상급자가 부정적인 꼬리표를 붙인 사람에 대해 악으로 대하고 냉담하게 대하는데, 그 결과는 오히려 자신의 선심과 양심을 약화시켜 자신을 상급자의 도구로 만들 뿐이다.

제사장이 보여준 이러한 ‘꼬리표 달기’ 식의 냉담함은 2천 년 전 여리고 길가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사회 환경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1999년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중국공산당(중공)의 선전을 믿고 파룬궁수련자를 감시, 납치, 학대하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반면 파룬궁수련자는 각양각색의 세상 사람들을 마주하면서도 자신에게 편견과 원한을 품지 않도록 요구하며, 시종일관 선의로 진상을 알리고 사람들의 양심과 선념을 일깨우는 것을 견지하고 있다. 그들이 근거로 삼는 것은 신분, 부, 혹은 직위라는 꼬리표가 아니라, 상대방을 인류로서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과거부터 ‘한 방울의 물 같은 은혜라도 솟아나는 샘물처럼 갚아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하물며 생명을 구해준 은혜임에랴! 은혜를 알고 보답하는 것은 보편적인 양심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선악은 단지 한때의 한 가지 선택에 그치지 않는데, 선악을 선택하면 모두 그에 따른 결과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여기 한 가족의 사례가 있으니 모두가 이를 경계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산둥성 지난(濟南)시 강청(鋼城)구 황좡(黃莊)진 치산(棋山)촌 서기 치칭위안(齊慶遠)은 원래 행복한 다섯 식구의 가장이었으나 이미 사망하고, 지금은 병든 할머니와 손자 두 사람만 남아 빈집과 고급 차를 지키고 있다. 한때 부귀했던 가정이 어떻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됐을까?

알고 보니, 1996년 치칭위안의 아내는 심각한 당뇨병을 앓아 생활을 스스로 돌볼 수 없었고, 전적으로 남편의 수발에 의존했다. 이후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따라 함께 파룬궁을 수련했고, 곧 당뇨병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1999년에 이르러 파룬궁에 대한 전면적인 박해가 시작되자, 치칭위안의 아내는 겁에 질려 감히 연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법서적과 자료를 모두 파출소에 넘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당뇨병은 재발했고, 온종일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면 치칭위안은 어땠을까? 그는 자신의 관직을 지키기 위해 파룬궁수련자를 박해하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파룬궁 사부님과 파룬궁을 욕했으며, 일찍이 경찰에게 이렇게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만약 그들이 또 도망치면, 총을 쏴서 죽여 버리면 돼! 그들을 구치소에 가두고 못 나오게 해!”

한때 신앙으로 혜택을 입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광적으로 창끝을 돌렸다. 예로부터 ‘차라리 삼강의 물을 휘저을지언정, 도를 닦는 사람의 마음은 어지럽히지 말라’라는 경고가 있었건만, 이 가족은 오직 일시적인 돈벌이에만 급급할 뿐 고대 중국인들이 상식으로 여겼던 이 옛 가르침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 사람이 양심과 감사하는 마음을 철저히 저버렸을 때, 그는 하늘의 가호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내면의 평온과 가정의 응집력마저 파괴해 버렸다.

어느 날 응보가 갑자기 내리기 시작했다. 먼저 2007년 여름, 치칭위안은 같은 마을의 한 정신 질환자에게 복부를 찔려 그 자리에서 사망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 52세였다. 사람이 스스로 권세를 손에 쥐고 타인을 지배할 수 있다고 착각할 때, 인생의 무상함 앞에서 생명이 얼마나 연약한지 예측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016년, 치칭위안의 아들은 말기 암 진단을 받았고 두세 달 후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불과 40여 세였다. 며느리는 2019년에 골수암 진단을 받고 곧 절단 수술을 했으나 결국 2020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 24세인 치칭위안의 손자는 자폐증을 앓고 있으며 온종일 집에서 컴퓨터 게임만 하면서 “누구든 다시 나보고 출근하라고 하면 건물에서 뛰어내릴 거야!”라고 말한다. 원래라면 슬하에서 재롱을 떨며 기쁨을 주었을 손자지만 지금은 정신적 황무지 속에서 스스로를 유배시키고 있다.

치칭위안의 아내는 어떨까? 당뇨병 합병증으로 눈이 침침해져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생활을 스스로 돌보지 못한다. 할머니와 손자 두 사람의 식사는 모두 마을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것에 의존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굶주려야 한다.

이 가족은 분명 파룬궁을 수련해 혜택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정부의 선전을 믿기를 택했고, 집안이 파룬궁과 원수가 됐을 뿐만 아니라 경찰을 이끌고 밤낮으로 같은 마을 파룬궁수련자를 괴롭혔으며, 파룬궁을 위해 감히 청원하는 수련자를 박해하는 데 쓰라며 경찰에게 전적으로 자금을 제공했다. 또한 파룬궁수련자에게 농사지을 땅을 주지 않았고, 수련자가 집을 지을 때 쓸 큰 나무를 몰래 팔아넘기는 등 다방면으로 수련자에게 박해를 가했다.

그들은 사람이 선악에 대한 판단 능력을 잃을 수는 있어도, 하늘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백 년 인생에서 눈앞의 현실이나 한순간만 봐서는 안 되니, 누구에게나 부모와 자손이 있지 않은가? 누구에게나 생전과 사후가 있지 않은가?

참고:
[1] 자료 출처: 명혜망, ‘인간이 풍수를 키우는가, 풍수가 인간을 키우는가

 

원문발표: 2026년 4월 13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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